카테고리 없음

조선통신사 의 여정

김홍열 의 블로그 2023. 5. 29. 13:07

요즈음 의 한일관계 를 보면서........

지난  임진왜란도 생각해 보았고, 한일합방도 생각해 보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위안부 문제 도 생각해 보았다.  정말로 여러사람앞에 죄를 지은 대역죄인 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미국 진주만 을 먼저 공격하여 서로 원수사이 였는데도 지금은 서로 아주 친한 사이가 된것도 생각해 보았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픈역사든, 좋은역사든  역사적 사실 은 지울수없는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  를 지워버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 미래를 위해서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역사 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지난날 의  슬픈과거 에 묶여서 마음을 닫아 버리면 서로 사람이든 국가 든 발전 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현명한 판단이 필요 하다고 생각한다.

 

그런차원에서  과거 조선시대 에 200여년간  조선통신사 를 일본에 파견하여 서로 화기애애 하게 지냈던 조선 과 일본 과의  관계 를 이번에 한번 포스팅해 보고자 한다.

마상재 :말을타고 달리며 묘기를 부리는것. 영천에서 통신사 에게 묘기를 보여줬는데, 훗날엔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가서 묘기를 보여 주었다.
조선통신사역사관
영가대 : 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떠나기전 제 를 올리던곳

조선통신사 연표

1회1607년504명.   2회1617년428명.   3회1624년460명.   4회1636년478명.       5회1643년477명. 

 6회1655년485명.   7회1682년473명.   8회1711년500명.   9회1719년475명.   10회1747년475명. 

 11회1763년477명.   12회1811년328명.

 

일본 의 도요토미 히데요시(1526-1598년) 는 1592년(14대.선조25년)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 을 일으킨다.

이때 일본은 조선 의 불상.불화.서적.인쇄술.도자기공.각종문화재 등등 을 약탈해 갔다.

그리고, 1598년8월18일 도요도미 히데요시 가 갑자기 병사 하면서 조선침략 은 중단 이 된다.

 

이에 다시  조선 과 의 교류 를 간절히 바랬던 대마도 군주 는 조선 과 일본 막부장군  사이에 오고가는 국서의 내용 을  중간에서 위조 를 하여 그 덕분에 조선은 1607년12월 에 첫번째 통신사 를 파견하게 된다.

 

한양에서 출발 할때는  100여명 정도 였는데,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중간 중간 에 인원이 합류 를 하여

마지막 부산 에서는  모두 약500여명 이나 되는  인원 으로 불어 났다.

 

일본 으로 떠나기전 엔 부산 영가대 에서 '새벽한시' 에 용왕 에게  해신제 를 지내었다.

배 는 당시 특별히 건조된 6척 의 배에 나누어 탔다.

부산 을 떠날때는 대마도주 가 미리 보내온 배를 따라 갔는데,

풍향에 따라 대마도 의 '사스우라' 또는 '와니우라' 에 먼저 입항을 하였다.

그후 바람이 잘 불어주기 를 기다렸다가 대마도 해안을 시계방향으로 따라 돌면서 내려가서 최종적으로 대마도주 가 머무르고 있는 '이즈하라' 에 입항을 하여 공식영접 을 받았다.

대마도주 는 통신사일행 의 안내 및 경호.임무 를 맡았다.

일단 통신사 일행이 행렬을 이루어 출발을 하게되면 선두호위(일본인) - 통신사일행 - 후미호위(일본인)

이런 순서로  행진 을 하는데  그인원숫자가 통신사일행500여명, 일본 호위군 일행 1500여명 하여

합이  무려 2천여명 이나 되는 실로 엄청난 규모 였다.

'행렬도' 에 보면 말뒤에 어깨에  뭔가 를 메고 바짝 따라가는 사람 이 나오는데,

이 어깨에 맨건 다름아닌  '말이 가면서 배설한 말똥을 얼른 바구니에 주어담는 말똥바구니 인것이다'

 

기본적으로 당시엔 엔진 이나 증기기관 이 없던 시절이라 돛 과 노 를 사용 하였으니 날씨가 나쁜날 에는 몇일씩 배에 같혀서 꼼짝도 못하고 시달렸던 모양이다. 통신사측은 이정도면 갈수있지않겠느냐고 따지고, 대마도측은 위험해서 안된다고 서로 언쟁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막부 는 통신사 일행 을  최고수준 의 의례 로 대접을 하였다.

조선 은 흔하게 집에서 돼지 를 키웠지만 당시 일본 에서 는 돼지 를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잔치집 에 돼지고기 는 필수 인 조선인 들의 풍습을 일본도 익히 알고있는지라, 

통신사일행 식단 에 돼지고기 가 빠져있는걸 알고 부랴부랴 멧돼지 를 사냥하여

멧돼지고기 가 올라 왔다고 한다.

한번 통신사 일행 을 맞이하는데 총 14,000여척의 배 와 1만여명 의 인원 이 동원 되었고 

사용한 비용 은  약100만냥 (막부 의 1년수입 77만냥 ) 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막대한 비용지출이 문제가 되어 막부 는 각 지방에 비용을 차출하였고 지방은 지방대로 부담을 안게 되었다고 한다.

이문제 가 현실화 된것이 1711년(숙종37년) 8대 통신사때  였다.

10대통신사 때 는 1748년2월16일 부산을 떠나 대마도 와니우라 에서 머물던중 배에 불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화재 로 2명 이 죽고10명 이 부상 당했으며 예물중 인삼70근 이 불에 타 버렸다.

'별봉'(선물목록) 에 인삼 70근 이 들어 있는데 불에타 버렸으니 조정 에서는 난리가 났다.

보고 를 받은 영조 는 급히 백성들 에게서 인삼 을 사려 했으나,  싸게 가격을 치는 바람에 백성들이 인삼을 감추고 팔지 않는 상황 에 이르렀다.

이에 영조는 가격을 후하게 쳐주라고 다시 분부 하여 가까스로 인삼70근을 만들어 부랴부랴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

어떤때는 임금에게 하직인사 를 올리고 한양을 떠나 부산에 도착후 해신제 까지 지냈지만 풍향이 맞지않아  근 한달간 을 기다리다 대마도로 떠났는데  당시 통신사475명이 부산 에 갑자기 오래 머무르는 바람에 먹을 음식물을 대기위해 부산주변 고을들이 피폐해져 고생을 무척 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통신사들 의 사행록 기록에 보면 날씨가 나빠서 모두 구토를 하는등 파도에 자주 시달렸으며,

어떤배는 배 조종 을 잘못하여 배가 도로 부산 으로 돌아가는 웃지못할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통신사 일행 의  당시 최고 책임자 였던   '조엄'정사 는 대마도 에서 고구마 를 발견하고 

고구마줄기 를 실은 배한척을 부산 으로 미리 실어 보내서

부산영도 에서 고구마 를 처음 재배하기 시작 하였는데 당시 이고구마 를 '조내기고구마' 라고 불렀다.

 

그리고 1703년엔 대마도군주 에게 보낸 '문위행'  일행 112명이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 로 가던도중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면서  대마도 도착 불과 100여미터 남겨놓고 배가 좌초 를 하여

전원 이 사망한 사건 이 발생하였고

그리고 1766년엔 부산앞바다 에서 좌초해 역시 '문위행'  일행 103명중 93명 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대마도 히타카츠 에는 1703년 의  '문위행'  외교사절사망자 위령비 가 세워져있다.

 

'통신사' - 조선 국왕 이 일본 막부 장군 에게 파견한 외교사절단

'문위행' - 조선 예조 에서 일본 쓰시마 군주 에게 파견한 외교사절단

 

   <통신사 행렬순서> 인원:최소328명.최대504명

청도기- 가는길 을 깨끗이 한다 는 의미.

형명기- 용 의 그림.

욱    기 -큰삼지창 에 소의 꼬리털 달음

취타악대

용정자 - '국서' '별봉'(선물목록) 등이 들어있는가마.

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

서기

양의+한의

소  동-잔심부름꾼

마상재-말재주 공연자

기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