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승선중인 대진8006호 가 모래 를 하역하기 위하여 제주도 화순항 에 접안을 하였다.
시간이 되어 외출복 으로 갈아입고 예전에 제주도 에 살때 가보았던 산방산을 실로 몇십년 만 에 가보기로 하였다.
가다보니 '하멜기념비' 가 보이고 저멀리 바닷가 쪽 으로는 '하멜' 이 타고왔던 '스페르베르호' 도 복원을 하여 만들어 놓았다.
다가가 보니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아서 선내 로는 들어가 보지 를 못하였다.
옜날 학창시절에 시험문제 에도 나왔던 '하멜 표류기' 에대해서 한번 몇자 적어 볼까 한다. 네널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베르'호 는 64명 의 선원들과 교역물자 를 한가득 배에 싣고 네덜란드 를 출항하여 일본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의 항해 길에 올랐다.
1653년6월18일 자카르타 항 을 출항하여 대만을 들렸다가
마지막 목적지인 일본의 나가사키 항으 로 가기위하여 제주도 인근 남쪽해역 을 항해 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비바람 이 몰아치는 풍랑 으로 변해버렸고 이에 난파 를 당한 '스페르베르'호는 항해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파도에 의해 제주도 로 떠밀려 오게 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은 36명 이었다.
이들은 제주시 관덕정 으로 안내되어 제주목사 이원진 의 심문을 받는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서로 의사전달이 불가능 하였다.
이소식을 들은 '효종' 은 통역사 로 네덜란드인 '얀스웰터브리' 를 내려 보낸다. 이사람은 당시 조선에 귀화 하여 '박연' 이라는 한국이름 을 가지고 있었고, '훈련도감' 에서 일하는 요즘 의 공무원 신분 이었다.
그럼 또 이 '박연' 이란 사람 은 누구인가?
이사람도 같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이었는데 1627년 제주도 인근을 항해 하다가 배에 식수 가 떨어져서 물좀 얻으로 제주도 에 상륙하였다가 주민들 에게 붙잡힌 사람 이었다.
'외국인이 한번 조선에 들어오면 돌려 보내지 않는다' 는게 당시 법 이었다고 한다.
서울로 압송된 '얀스웰터브리'는 화포 의 제작법 과 조종법 을 알고 있었는데 그 실력을 인정받아 '훈련도감'에서 근무 를 하는 계기 가 되었다.
이들의 한양 으로 올라가는 루트 가 '하멜표류기' 에 나오는데, '제주도-해남-영암-나주-장성-정읍-태인-전주-여산-은진-연산-공주-천안-큰강(한강)을 건너서-한양에 도착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효종' 을 알현한 자리에서 '네덜란드로 돌려보내달라' 고 간청을 하지만
'효종'의 대답은 '그냥 죽을때까지 여기서 살아라' 였다.
그리고는 '박연' 과함께 '훈련도감' 에 취업이 되어 일정급료 를 받아가며 조선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나라 사신 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은 청나라 사신 이 돌아갈즈음 길목에 지켜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이사신들 을 붙잡고 하소연 을 하였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또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사신들 은 이들의 말뜻을 못알아 들었고, 적당히 사신들에게 뇌물을 주고 없던일로 하여 버렸다.
이사건으로 인하여 주동자2명 은 감옥에가서 거기서 고문으로 죽었다.
그리고 이에놀란 '효종' 은 이들을 전라도 여수 지역으로 유배 를 보내 버린다.
여수에 유배된 이들은 그때부터 먹고사는게 힘들게 되었다.
이곳에서 힘들게 살면서 그동안 동료들이 모두죽었고 이제8명 만이 살아 남게 되었다.
이들은 여기서 죽느니 탈출을 하다 죽더라도 탈출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리고는 실행에 옮겨 조선에 온지 13년 만에 탈출에 성공 을 한다.
이들 '하멜'일행은 일본에 도착후 거기서 1년 을 살다가 네덜란드 상선 을 타고 네덜란드 로 돌아간다.
당시 하멜의 선내직책 은 '서기' 였다고 한다.
따라서 매일매일 의 기록을 하는게 그의 임무 였는데, 한국에서 의 13년간 생활을 거의 매일 일지형식 으로 기록을 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그동안 있었던 일 을 '정식 업무보고서' 로 작성하여 회사에 '보고' 를 하였다.
이를 근거로 '동인도회사' 는 '하멜 과 그 일행' 들에게 그동안 의 급료를 모두 정산하여 지급 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지은 '하멜표류기' 는 유럽 여러나라 에 우리 '조선' 을 최초로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