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M 항공편 으로 인천공항 을 이륙하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에 도착하여
다시 작은 비행기 로 갈아타고 모두합쳐 장장 12시간 의 비행 끝에 루마니아 오토페니 국제공항 에 도착 하였다.
지금은 헨리코안다 국제공항으로 이름 이 바뀌었다.
2004년 루마니아 정부는 루마니아 의 비행기 개척자이자 세계최초로 제트기를 발명한 헨리코안다 교수를 기념하기위해 현재의 헨리코안다 공항으로 명칭을 변경 하였다.
1989년12월25일 에 혁명이 일어나 독재자 차우체스쿠 가 총살을 당하고
사회주의국가 에서 민주화 로 된지 10여년 이란 세월 이 흘러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심사대 가있는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좀 의아해졌다.
보행자 통로든 사무실 이든 대합실 이든 건물전체가 몇 개 안되는 형광등이 빛을 내고 있었고, 어두컴컴 하였으며, 그것도 반은 껌뻑 거리고 있었다.
대합실 화장실 에 갔더니 우리나라 같은 하얀 티슈 로된 화장실 휴지가 아니라 뭐랄까 누런 마분지 로된 화장지 였는데 질이 형편없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훔쳐가지 못하게 소형 자물쇠 로 희한하게 채워져있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오니 현지인 직원이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현지직원 과함께 주차장 으로 가보니 거긴 더 암흑세계 였다.
담배피우러 먼저 나갔던 일행이 어디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할수없이 낯선 타국 국제공항 주차장에서 야밤에 고함을 질러 서로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닌 끝에 찾을수가 있었다.
외국인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하였다.
꼭 시골사람 이 서울역 에 도착하여 서울역광장 에서 창피한지도 모르며 야밤에 고함을 질러대며 서로 찾아 헤메는 모습 과 똑같았다.
우리를 싣고갈 승용차를 보니 이또한 가관 이었다.
루마니아 국민차 ‘DACIA' 란 승용차 였는데, 우리나라 현대자동차 의 ’포니‘
는 너무 좋은차 였다.
그비좁은 승용차 에 4명이 승차 하여 덜덜거리며, 우리는 루마니아 의 밤길을 그렇게 달렸다.
근데 차가 일정한속력 으로 달리는게 아니었다.
달리는가 싶으면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고, 또 잘 달리는가 싶으면 이번에는 핸들을 훽 돌린다.
비행시간에 지쳐 눈좀 붙이려니 도대체 이건 뭐 차가 아스팔트도로 를 달리는건지, 시골길 비포장을 달리는건지, 차멀미 가 날정도였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자세히 보니, 이건 도로 가 아스팔트길 같으기는한데 무슨 구명이 그리도 많이 나있는지 차가 제대로 일정한 속력을 낼수 가없었다.
운전기사 직원 왈 혁명이 일어난 후 지금까지 한번도 도로포장을 하지 않았단다.
전국적으로 똑같이 어딜가나 도로가 다 이렇단다.
도시간에 고속도로 라는건 아예없고 ,
이게 그당시 루마니아 의 지방도로 사정 이었다.
뭐 정말 이런도로 가 있나 싶었다.
우리는 가다가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소변도 보고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우리와는 다른 생소한 사회주의 국가 의 휴게소는 어떠한지 궁굼했다.
휴게소 란게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손님이 와도 반갑게 맞아주는게 아니라 ‘너왔냐’ 식 이었다.
웃음이나 친절함 은 찾아볼수 없고, ‘뭐먹을래식’ 주문을 받아갔다.
간단한 음료 와 요기를 하고 우리는 망갈리아를 향하여 다시 덜컹거리며 밤길을 달렸다.
우리가 도착한곳은 ‘망갈리아’ 가 아닌 ‘코스티네스티’ 라는 작은 시골 해변가 마을 이었다.
< 루마니아 도로 표지판..>
<국경통과 도로 는 비교적 포장이 잘되어있다>
< 루마니아어 는 써있는데로 읽기만 하면 된다 >
거기에 우리가 묵을 숙소 가 있었다.
회사에서 방이 여러게 달린 건물을 통째로 임대를 하여 직원들 숙소 로 활용을 하고 있었다.
방배정을 받고 눈을 붙이는둥 마는둥 아침이되니 그전에 먼저와서 머물고 있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루마니아 현지인 아줌마가 해주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한참을 기다리니 출근용 미니버스 한 대가 도착을 하였다.
한국사람,현지인,뒤범벅이 되어 승차를 하고 버스는 출발을 하여 망갈리아 시내를 통과하고 조선소 정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로 안내되어 사장 및 임직원 들이 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각자 통성명 인사가 끝난후 우리는 임무가 주어진대로 부서별로 헤어져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소 현지인 일반근로자 의 평균급료 는 월250불 정도 되었다.
그리고 조선소 주업무 가 배를 새로 만드는 신조선 보다는,
기존에 운항하던 배들이 수리하기 위하여 Dry Docking 을 하는 조선소 로써
대우망갈리아 조선소를 찾아왔다.
다른 유럽선진국 조선소 보다는 싼인건비 때문에 수리비가 저렴 하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수리를 마치고 출항할때쯤 에는 선주측 과 조선소측 간에 옥신각신 하는 골치아픈 정산문제 가 꼭 발생하였다.
그것은 수리를 하는 외주 하청업체직원 들이 배에 수리하러왔다가 그날 그날 퇴근할 때 돌아가면서 배에서 뭐든 하나씩 돈이된다 싶으면 하나씩 가져 가는것이었다.
말이좋아 가져가는거지 실은 훔쳐가는것이었다.
그 외주업체직원들은 주로 짚시들 이었는데
그들은 수리하러온건지, 훔치러온건지 뭐가 진짜 주업무인지....
그솜씨들이 보통기술 이아니었다.
급기야는 정문에서 가방검사를 아무리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이유는 퇴근전에 담장이나 개구멍을 통해 미리 물건 은 다 빼돌려 놓는다.
담장을 관리하는 경비도 한통속이다.
정문에서 걸리는 경우는 초보자이고, 노련한 경험자 는 절대 걸리지 않는다.
한번은 정문에서 퇴근검사를 하는데 걷는모습이 희안하게 오뚝이처럼
뛰뚱뛰뚱 걷는게 수상하여 몸수색을 하여보니....
전선을 껍질은 벗겨내고 구리전선 만 알몸에 칭칭감고 그위에 옷을 입었는데 너무많이 감아서 걸음을 제대로 못걷는 바람에 딱 걸린 케이스도 있었다.
선주측에서 올라오는 분실물 리스트를 보면 주로 구리로된제품, 값나가는공구,각종 볼트너트,전선,개인물품인 카메라, 주방요리기구,뭐 다양하게도 훔쳐갔다.
조선소 내에는 외주업체들이 사용하는 사무실과 창고같은 컨테이너가 한곳에 밀집되어 있는데, 거기가보면 자기네들 끼리도 서로 훔쳐가고, 잃어버리고, 매일 시끄럽고 야단법석 을 떤다.
루마니아 에서는 되는것도 없고, 안되는것도 없다.
한번은 윤ㅇㅅ부장 이 저녁에 망갈리아 시내에서 사람을 치어 사망하는 교통사고를 내었다.
사망자는 술을 마신상태에서 도로를 무단횡단 하다가 사고를 당했고,
윤부장은 제대로 신호를 지키며 , 정속도 로 운전을 하였다.
조선소 내 현지인 직원들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경찰서를 다녀왔고,
사망자는 가족이 없는 떠돌이 짚시여인 으로써, 보상할 가족도 없으니,
장례만 치르고 잘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우리는 ‘코스티네스트’ 숙소에서, 망갈리아 시내쪽 으로 회사에서 아파트를 얻어줘서 아파트 로 이사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현지적응을 해나갔다
한번은 저녁에 퇴근후 해변가에서 생맥주를 거나하게 한잔씩 하고 걸어서 집으로 오는중에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최헌 의 ‘오동잎’ 조용필 의‘돌아와요부산항에’ 등 노래를 신나게부르며 합창을 하면서 갈지자 걸음 으로 걸으면서 집에 도착을 하였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찰나 뒤에서 경찰아저씨가 잠깐 신분증을 보자면서 검문을 하였다.
루마니아에서 금지된 술먹고 길거리에서 휘청이며 고성방가를 하였단다.
우리는 경찰 아저씨들과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몇푼 쥐어주고 해결을 보았다.
그리고 휴일에는 시간나는데로 망갈리아 시내를 섭렵하고, 가까운 콘스탄챠 로 발길을 돌리며, 루마니아 의 수도인 부카레스트 에 가서 사람들도 만나고하면서, 이렇게 조금씩 현지적응을 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금씩 루마니아 의 사회적 시스템 이라던지 한국보다는 여기서 한번 기회를 가져보는것도 좋겠다 라는 생각이 자꾸만 마음속에 다짐 이 들어갔다.
그때쯤 한국에는 IMF 의 후유증 으로 인하여 사회가 어렵게 돌아가는 시기였다.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마땅히 해결책이 없었다.
드디어 마음 의 결정을 하였다.
루마니아 와 생활수준 도 비슷한 같은 동유럽 이웃발칸국가 인 불가리아 는 어떤지 그나라도 궁굼 하였다.
망갈리아에서 승용차로 한10여분 가면 루마니아-불가리아 국경이 있다.
국경에서 좀 기다리면, 루마니아에서 불가리아를 경유하여 터어키 로가는 장거리 리무진버스 가있다.
그버스를 타고 불가리아 의 자그마한 해변도시 바르나 에서 내렸다.
바르나 시내를 도보로 구경좀 하면서 역전으로 이동을 하였다.
역전에서 불가리아 의 수도인 소피아 까지 가는 열차를 이용하여 소피아역전에 도착하니, 미리연락을 취해 놓았던 미토브 씨 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여기서 잠깐 미토브씨의 재미난 경력을 소개하여볼까 한다.
그분은 당시 연세가 한70세 정도는 되는분 이었는데...
젊은시절 공부를 잘하여 불가리아 외교부에서 실시하는 북한 교환장학생 으로 선발되어, 평양 김일성 종합대학 으로 유학을 간 사람이었다.
무사히 졸업을 하고 평양에 있는 불가리아 대사관 에 취직이 되어 그곳에서 주-욱 근무를 하였고, 나중에는 평양주재 불가리아 대사 까지 한 사람 이었다.
거기서 대사임기를 마치고 불가리아로 귀국을 하였다가, 다시 이번에는 우리 한국 의 서울주재 불가리아대사 로 부임을 하여 근무를 하였던 인물 이다.
한국어도 능숙하여 그분의 툭하면 하는 재미난 말이 있었는데
난 그 말을 들을때마다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한 말이었다고 생각 이 들었다.
“북한 아이새끼들 정말 돌대가리 입네다”
미토브씨의 안내를 받아 그분의 집도 방문을 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앨범 과 북한에서 살면서 찍은 그의 젊은시절의 여러 사진들 도 보여 주었다.
금강산 에도 다녀온 사진 이있었다.
그리고 또 역시 하는말...
“북한 아이새끼들 정말 돌대가리 입네다”......
불가리아에서 할만한 일거리들이 무엇이 있을지 그분의 안내로 여기저기 함께 돌아다녀보았다.
소피아 에는 한국의 한라산 정도 높이로 솟아있는 큰 산봉우리 가있는데
이산이 소피아 시민들 에게는 4계절의 아름다운 풍광을 제공 한다고한다.
한국에서 국산자동차 부속을 수입도 하고, 카센타도 운영하는 교민도 만나 보았고, 독일같은 유럽선진국에서 중고냉장고를 수입해다가 자체수리를 하여 판매하는 독일인도 만나 보았다.
1층에는매장. 2층에는수리센타. 3층에는살림집. 제법 규모가 짜여져있었다.
불가리아여성 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왼쪽 Mr.Mitov / 독일인매장 3층 살림집에서...
4박5일 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미토브씨에게 가이드비 도 섭섭지 않게 지불해주고 루마니아 로 돌아왔다.
돌아올때는 소피아-루세-부카레스트 노선의 6인실 3등칸 덜커덩거리는 제일 저렴한 열차편 으로 돌아왔다.
미토브 씨가 대우망갈리아조선소 를 방문했을 때, 받아논 명함 이있었는데 그때부터 서로 연락하는사이 가 되었다.
불가리아에서 돌아온후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불가리아에서 사용하는 문자 는 영어가 아닌 ‘끼릴문자’ 라고 해서 러시아 에서 사용하는 문자인데
영어를 배운 나에게는 헷갈릴뿐 아니라, 색다른 언어 를 새로 시작하려면 그 심적 스트레스 가 보통이 아닐 것 같았다.
반면에 루마니아어는 글씨가 써있는데로 읽기만 하면 되는데, 발음하는데 별 어려움 이 없었다.
외국에서 살아가려면 제일먼저 언어극복 을 해야 하기때문에 나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일단 불가리아는 제키고, 루마니아에서 살아보자고 결심을 하게된다.
그때부터 주로 부카레스트를 중심으로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만나고 다니며 정보를 얻었다.
그당시 루마니아 에 투자한 외국 기업중 1위 가 우리 한국기업 이었다.
한국의 대우그룹 의 김우중 회장 이 크라이오바 에 대우자동차공장을 , 망갈리아 에 대우망갈리아조선소 를 운영 하므로써, 그때부터 루마니아 에서는 아시아 의 작은나라 꼬레아 가 지구상 에 어디 붙어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한국을 잘사는나라 로 인식을 달리 하게되었다.
덕분에 우리 한국인들은 루마니아 어디를 가든 한국인 이라고 하면 깍듯이 대우를 해주었다.
당시 대우망갈리아 조선소 에서는 OJT프로그램 에 의해서 매년 약300명 정도 의 현지인들 을 한국으로 데려와서 교육도 시키고, 훈련도 시키고 했는데 그때 신문사 기자들도 함께 따라와서 이들의 일정을 취재해 가기도 했었다.
이들의 훈련일정을 취재했을뿐만 아니라, 지방 시골로 내려가서 여러 가지 한국의 풍습 도 소개를 하곤 했었다.
그중에 재미난 기사 하나가 루마니아 일간지 신문에 소개가 되었는데....
제목이
‘한국은 일요일에도 밭에나가 농사를 짙더라’...... 였다.
루마니아는 오랫동안 독재자 차우체스쿠 의 통치아래 사회주의국가 체제하 에서 살아왔고 , 정교회 가 국교 로 지정이 되어있어서 도시건 시골이건 일요일엔 모든사람들이 쉬는날 로 정해져 있다.
그리고 루마니아 는 정부 부서 에 ‘종교부‘ 가 따로 있다.
정교회신부 는 정부에서 월급을 주는 공무원 신분 이고, 한국처럼 교회헌금 으로 교회가 운영이 되는게 아니기 때문에, 정부에서 교회수리비용 및 모든비용을 지원 해준다.
루마니아 는 한국처럼 교인들이 헌금을 내서 교회가 운영되는 시스템 이 아니다.
수염을 가급적 길게, 그리고 멋있게 길러서, 품위있게 쓰다듬으며 정교회 신부만 되면.....
루마니아에서 는 완전 ‘장땡’ 인것이다.
대통령도 종교부 장관 앞에선 겸손해 진다.
도시던 시골이던 일요일엔 온가족이 정교회 에 가서 예배도 드리고 쉬는날로 인식이 되어있다.
그런인식 이 박혀있던 루마니아 기자 의 눈에는
한국의 ‘일요일에 밭에나가 일하는모습’ 이 신기하게 보여졌던 모양이다.
반대로, 우리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루마니아 도 정말 이해가 안가고 신기한게 한두가지 가 아니었다.
특히 제일 이해가 안가는게 각 관공서 마다 근무시간 이 제각각 이어서 미리 업무시간을 알아놓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십중팔구 허탕치고 돌아올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돌아오면서 하는말이 있었다.
“에이, ㅆ.ㅍ. 이런 루마니아에서 계속 살어,말어..”
당시 루마니아 는 독재자 차우체스쿠 가 처형 이되고 민주화 가 된지도 10여년 이란 세월 이 흘렀어도, 사회의 전반적인 모든체제 는 바뀐게없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병원응급실 은 또 어떠한가?...
모든사람 이 공짜이고, 외국인도 여권만 있으면 공짜다.
그래서 돈안드는 응급실 은 항상 병원 이라기 보다는
동네시장바닥 으로 생각하면 된다.
시끄럽게 떠들고, 질서도없고, 아이는울고, 환자는아프다고울고.....
누구하나 질서를 위하여 제제를 하거나, 안내하는사람도 없다
한국처럼 번호표 는 당연히 없을뿐더러,
아무나 힘센놈 이 먼저 세치기 해서 접수 하면 그만이다.
의사나 간호사나 한국처럼 친절함 이란 찾아볼수도 없고
그져 무덤덤히 진찰을 진행 할뿐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의 병원 이기 때문에 의사의 의료기술 도 좀 한국보단 상당히 뒤쳐져 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에 일반 개인병원 은 진료비 가 대단히 비싸다.
물론 비싸고 시설좋은 개인병원 이 있기는 하다.
한번은 응급실병원을 방문하였다가 기절초풍 할장면을 목격 하게 되었다.
병실의 문이 열려있고 환자 들을 보니 전부 짚시환자들 이었는데,
단체로 침대마다 한명씩 프라스틱 바께쓰를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잠시후 의사팀이 오더니 순서대로 환자 를 부르니, 환자는 가지고있던 바께쓰 를 들고
의사 앞으로 가는거였다.
그리고.......는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목에 마취도 안하고,
“아”..하라고 하더니
그대로 위내시경을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환자는 죽는다고 꿱꿰거리고.....
끓어안고있던 바게쓰 는 침뱉는 통이었다.
그걸지켜보고 순서를 기다리는 다음 환자는 긴장이되니 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다.
한사람씩 안보이는 방에서 하든가....
목에 마취도 없이 단체로 생짜배기 위내시경 하는 모습 은 루마니아에서 처음 보았다.
이게 사람 사는 동네 인가 싶었다.
이렇게 병원이 모두가 무질서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
그것은 돈없고 가난한 루마니아 짚시환자 들이 많이 오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원주민 은 원래 라틴계 민족이라서 친절하고 상냥한 민족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골치아픈 짚시들 이 차고넘치다보니 이제 루마니아 는 골치아픈 나라 로 전락하고 말았다
루마니아 짚시가족
루마니아짚시 들은 대부분 인간이하 의 대우를 받으며, 멸시를 당하고 살아가고 있다.
차우체스쿠 시절 선진국 서유럽 에서 한때 이 골치아픈 짚시들 을 강제추방 시킨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을 따뜻이 맞이 해준 나라는 루마니아 였다.
그렇게 루마니아 로 흘러들어온 문제아 짚시들 은 역시 루마니아에 와서도 그버릇이 어디갈까?....똑같은 생활을 하였다.
이상하게 짚시족들은 일찍결혼 하는풍습 이있고, 또 다출산 을 하니 가족이 버글거리는 완전 대가족 단위의 생활 을 한다.
부카레스트 에는 겨울철이면 오갈데없는 짚시들이 유일하게 따뜻하게 지내는곳이 있다.
루마니아는 도시전체난방 을 중앙집중식 난방을 한다.
난방용 온수파이프가 지나가는 지하터널 이 있는데, 집과가족이 없는 떠돌이 짚시들 은 겨울이 돌아오면 모두다 그 지하 에 모여 집단생활을 한다.
맨홀을 열고 지하땅속으로 들락날락 하는게 사람으로써 참 희안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처량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짚시부모 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아이가좀 성장하면 일찌감치 사회로 내보내어 돈벌이 도구로 삼는다.
도둑질...쓰리꾼...야바위...퍽치기...빈집털이...구걸행위...세상의 모든 잘못된 짓들을 짚시부모들 은 자기자식들 에게 전수해주며 살아가고 있다.
짚시 들은 주로 고철수집을 주 비즈니스 로 살아가기도 하는데
이들이 지나가는 빈집 은 여지없이 뭐가 없어져도 없어진다.
시골 짚시마을 에 낯설은 벤츠 같은 고급차 가 동네 도로변에 밤새 주차를 했다면 그차주 는 큰실수를 한 것이다.
밤새 그차는 분해가 된다.
제일먼저 하는일 은
차를 한쪽씩 들어 밑에다 돌로 바쳐놓고 타이어를 빼간다.
고급차종이면 우선 백미러도 떼가고,
차안에 가방이 보이면 유리창을 깨고 가방을 훔쳐간다.
여기서 훔쳐간 타이어나 백미러는 다음날 중고 부속가게 에 가보면 떡하니 그곳에 있다.
차바퀴 가 없으니 이제 움직일수도 없다.
만약에 그곳에 하루더 차를 둔다면
이번에는 본넷트 부터 차근차근 없어진다.
결국은 모두 분해되어 없어지고 만다.
그들은 그들만의 짚시마을 을 형성하고 집단생활 을 한다.
시골의 이름모를 짚시마을을 통과할땐 차에서 내리지도 말고, 멈추지도말고, 짚시에게 말을걸며 묻지도말고 신속히 마을을 벗어나야한다.
차를멈추고 길이라도 물을라치면 차뒤에다 돌멩이를 던진다.
한번은 무슨 사진작가 라는분이 루마니아 의 짚시마을을 사진찰영하겠다고 하여 현지코디를 진행한적이 있다.
물어물어 시골 깡촌 짚시마을 을 사진촬영차 찾아갔는데..
동네 조그만 꼬마녀석들이 집단으로 따라 다니며 촬영을 방해 하여 정말 난감 하였었다.
누군가는 돌멩이를 던지면 저희들끼리 희희거리며 소리를 질렀고
사진작가의 등을 나무로 후려갈기고 도망가는놈도 있었다.
더 이상 위협을 느껴 중단하고 돌아오는데 차뒤에서 고함치며 돌멩이를 던지며 따라오면서 야단이 났다.
비포장 시골길 을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핸들 잡은손 이 후들거리기도 하였다.
루마니아 선교사분 들중에는 유난히 짚시마을를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시는분들이 많다.
그중에 김ㅈㄱ 선교사님 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선교사님 모친께서 밤에 혼자 짚시마을 에 있는 교회를 지키다,
동네 짚시들에게 강도살인을 당하여 돌아가시기도 하였다.
당시 한인사회에서 는 난리가 났었다.
경찰은 법인을 못잡는것인지, 안잡는것인지...
범인잡았다는 소식은 영영 없었다.
당시 루마니아 는 경제소득이 동유럽 에서 최하위 빈곤국 이 되어 있었다.
정부관료 들은 부패될대로 부패되어있고,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보니,
특히 외국인들은 조심하며 살아가야한다.
차우체스쿠 정권 그 이전 페르디난도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짚시도 별로 없었고, 동유럽에서 제일 잘살았던 루마니아 였다.
중절모를 쓰고 단장을 짚으며 한가로이 공원 을 부부가 산책을 하였고,
이야기하기 를 좋아하는 민족이라 공원벤취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비둘기에 모이를 주며 여럿이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민족 이었다.
사람들도 엄청 친절하고 상냥하다.
1차대전 때는 참전하여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밭침 이 되어 승전국이 되었지만, 2차대전때는 독일측에 가담하였다가 패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패전하면서 구)소련 이 정치간섭을 하면서,
당시 공산당 서열 2인자였던 차우체스쿠 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루마니아 의 앞날은 이때부터 먹구름 이 끼게된다.
그리고 루마니아 는 퇴락의 길을 걷는다.
국가지도자 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
그 국가지도자 를 잘못만나서 정치.경제.문화 적으로 후퇴하여,
오히려 빈곤국이 된 나라가 세계적 으로 얼마나 많은가...?
북한을 다녀온 차우체스쿠 는 김일성 과 의형제를 맺으면서,
당시 평양 에있는 ‘김일성주석궁’ 에 감명을 받고 돌아와서는,
살던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하물며 거기있던 정교회도 허물지는 않고 교회건물을 통째로 바닥에 레일을 깔아 옆으로 한 500미터 정도 이전을 하고,
그 명당자리 에 ‘차우체스쿠궁전’ 을 짓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짓기시작한 궁전 은 단일건물로는 세계에서 미국 펜타곤건물 다음으로 2번째로 큰건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있다.
그러나 차우체스쿠 는 그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1989년12월25일 부카레스트에서 시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다가 시민들이 반차우체스쿠를 외치며 야유를 보내자,
위협을 느낀 차우체스쿠 는 공산당본부 건물 옥상에서 헬기를 타고 현장을 탈출한다.
그러나 곧 혁명군에 체포되어 한적한 지방도시 ‘뜨르그베쉬떼’ 의 한 수도원 뒤뜰에서 그이튿날 즉결총살 처형 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된다.
짚시들을 불러 들였던 차우체스쿠는
28년을 독재자로 통치하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 골치아픈 짚시들이 이제는 번성을 하여 루마니아 국민의 13% 나 차지
하게 되었다.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러간다.
2007년에는 루마니아 도 EU 에 가입 되었고,
이제는 많이 바뀌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짚시의나라 루마니아 에 살면서 그때 몸소겪은 여러 에피소드 들을 다음편 에도 계속 올리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