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2월10일 자로 서산지부 로 발령이 났다.
당시 근무지역 이 전국구 이다보니 직원들 사이에서는 인사이동 철 만되면
불만 이 있는 직원들 이 종종 있었다.
이러한 불만 을 해소 하기위하여 노조에서는 본부 에 건의하기를,
연고지역 우선순위 로 인사발령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건의를 하였는데 이것이 임원회의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나는 충청도 가 고향 이기 때문에 충남지역 인 서산지부 로 발령이 난것이었다.
그렇게 하니 직원상호 간에 불만 이 어느정도 없어지고 인사이동 철이 되어도 좀 잠잠해 지는 분위기 였다.
우리나라 의 국내어선들은 업무특성상 배를 몰고 어느지정 장소 로 검사 를받으러 오는게 아니고,
반대로, 배가있는 각 항포구 로 검사원 들이 가 찾아가야 하는 일정이다.
아침에 출근 하여 전날 접수 된 검사물량을 배정받아 현장으로 출발하면,
저녁이 되어서야 사무실로 돌아오는 그야말로 강행군 의 경우 가 많았다.
당진, 성구미 에서부터 태안, 만대,를 경유하여 그리고 안면도, 영목항 까지
지도를 펼쳐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 먼거리 이다.
운전하는 시간이 하루종일 너무 길기 때문에 늘 운전에 조심 해야했다.
검사신청 이 들어와서 각 항포구 에 배가있다는 곳을 찾아가보면
포구 외진곳 에 있는 배들도 많았다.
좀 덩치가 큰 어선들 은 선주 가 개인 이 직접 검사신청을 하는경우가 많고,
조그만 5톤미만 의 소형어선들 은 어촌계 별로 집단검사 를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지역 에 무슨 큰 공장이나 국가산업시설 이 들어 온다 싶으면
보상목적 으로 운항은 하지 않으면서 방치된 어선들도 다수 있었다.
아주 골치 아플 때 가 한두번 이 아니었다.
검사가 안될 배 가 분명하면 어민들 머리가 참 비상하게 돌아간다
검사가 안될성 싶으면
포구 에 배를 접안시켜 놓는게 아니라,
저--멀리, 사람이 갈 수 없는 뻘 위에다 배를 얺혀 놓는다.
검사원 이 배 에 아예 접근을 할수 없게 만들어 놓는다.
별의별 선주 가 다있다.
심지어는 배도 없고 서류만 있으면서 뻘밭에 얺혀 있는 아무배 나 가리키며
‘저배 가 내배’ 라고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주장하는 어민도 있었다.
절대 이들의 꾐에 넘어가서는 않된다.
제주도 나 부산 에서는 조류 간만의 차가 없어서 거의 현장에 가보면 포구 에 배는 잘 정박되어 있는데,
이곳 서해안 에는 간만의 차가 커서 포구 에 배가 없을 때 가 종종 있다.
이럴땐 또 의심을 해야하고 지혜롭게 잘 대처 해야한다.
운항을 안하는배 같으면 계선계를 제출하도록 유도 하는게 제일 좋다.
서해안 어민들 은 두가지 의 부류 가 있는거 같았다.
한부류 는 진짜 바다의 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진정한 어민들이고
다른 한부류 는 다른직종의 업을 하면서, 고기는 잡지 않고 보상지역만 돌아다니면서,
운항 안하는 다른지역 어선들을 싸게 구입하여,
모두 자기 가족 앞으로 한척씩 명의를 변경해놓고,
보상 지역 여기저기 에 어선들 을 방치 해 놓는 부류 들이다.
당시 에 서해안 쪽에는 국가적 으로 산업발전 에 큰 프로젝트 들이 몇몇곳에 건설중 이었는데,
대산공단. 태안화력. 당진산업단지. 한보제철. 당진화력. 등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려고 계획이되어 있거나, 진행 이 되고있었다.
이 지역 의 어민들이 검사신청이 들어오면 우리들은 바짝 긴장을 하게 된다.
현장에 도착하여 ‘배가 어디있느냐’ 고 물어보면...
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
“저-기,..... 저 뻘밭에 있는 저배 가 내배 유-”
하면서 능청을 떠는 선주 가 분명히 나온다.
그런작전 에 넘어 가서는 안된다.
어민들은 우리가 모를줄알고 여러 가지 꼼수를 쓰지만 우리도 이런꼼수 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된다.
나중에 우리 가 다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 등록서류 만 있고 실체 가 없는 배 는 보상에서 제외 가 되는데,
만약, 동네 어느누구가 실체도없으면서 보상을 두둑히 받았다고 치자,
이런 보상문제 는 돈하고 관련이 되는 예민한 문제 이다보니,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받으면,
자기네들 끼리, 오죽하면 형제들 끼리도 싸우고
동네 전체 가 난리가 난다.
그래서 할수없이 이번에는 동네별로 보상금 이 나오는 경우 가 있는데,
이게 또 공평하고 쉬운거 같아도 시끄러운 건 마찬지다.
개인적으로 보상해 줘도 싸우고...
똑같이 동네별로 분배 해 줬는데도 싸운다,
동네가 보상 때문에 패가갈려서 인심이 흉흉한 마을도 여러마을을 보았다.
특히 어민들간에는 서로 남의집에 숟가락이 몇개정도까지 있는지
알고있는판국 이기 때문에 서로 가 서로 를 너무나도 잘들 알고 있다.
그러나, 속마음을 알다가도 모를사람 들이 보상지역 사람들이다.
적게받은 사람은 왜 저사람 은 나보다 많이 줬느냐고 따진다.
지금기억에 제주,부산 에서 보다 서산 에는 소형어선들이 많았는데
가는동네 마다 늘 시끄러웠다.
당시 나는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같이 이사를 다닐수 가없어서
대전 관저동 에 주공에서 분양하는 원앙마을 1단지 33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가족들은 대전에 있고,
나는 청양 처갔집 에서 장모님 께서 혼자 계시는게 심심 하실거 같아서
손수 해주시는 조.석.을 얻어먹고 청양에서 서산까지 출퇴근을 하였다.
출근을 하면 또다시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현장에서 출발하여 잠깐 사무실 들렸다가 퇴근은 청양으로 하였다.
결국 매일,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운전을 하여야만 하였다.
장거리 버스 기사들도 2-3일 에 하루는 휴무가 있는데,
우린 업무특성상 운전대를 놓고 편히 쉬는날이 거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 지나니까, 체력에 한계를 느꼈다.
퇴근하고 잠을 자는데 오한이오고, 침을삼킬수 가 없을 정도로 목이 아팠다.
아침 에 서산으로 출근 하면서 청양 시외버스터미날 옆에 있는
약국에 가서 예기하니 급성편도선염 이라고 하여 약을 조제하여 먹기도 하였다.
지금은 도로사정이 엄청 좋아져서 편도2차선 으로 넓어졌지만
그때만해도 편도 1차선에다 지방도 는 꼬불거리는 도로 가 대부분 이었다.
할수없이 집사람 에게 도저히 더 이상 청양 에서는 힘들어 못다니겠다고
예기하였더니, 그럼 서산에 있는 언니에게 예기해볼테니 좀 기다려 보란다.
그래서 그후로는 서산에 처형댁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출퇴근 이 이건뭐 식은죽 먹기였다.
사무실하고 직선거리로 약 1KM 밖엔 안되다보니 시간 이 널널 하였다.
새벽에는 뒷동산으로 아침운동 도 할 수 있는 시간 도 되었다.
동서형님 하고는 가끔 얻어오는 생선 으로 매운탕을 끓여서
저녁이면 안주삼아 형님먼저 아우먼저 쇠주잔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출퇴근문제 가 해결되다보니 마음 과 몸 이 훨씬 가벼웠다.
당시 체류하였던, 동서형님 이 살던 그집 이 좀 특이했는데
어느 문중 의 시제를 지내는 사당 같은 집이었다.
기와집 에 한옥 으로 대궐 처럼 지어진 집이었다.
동서형님 은 거기서 집 관리인 으로써 마당 잡초나 뽑고, 잔디나 가끔 깎으면서,
처형네 온식구들이 거주하며 살고 있었다.
나도 건너편 방한칸을 주길래 사용하였는데 마치 TV드라마 에 나오는
조선시대 사또관아 에서 사는 기분 이었다.
출근할 때, 높은대문 을 열면서 나는 ‘삐-익’ 하는 소리 가 귀에 익어갔고
창호지 로 된 방문을 여닫을땐 옜날 어릴적 시골 초가집 에서 여닫던
문풍지문 이 생각 나기도 하였다.
가을철 이 되면 주말 에 이쪽 저쪽 식구들이 모두모여 안면도 백사장항 으로
‘꽃게’ 와 ‘대하’ 를 먹으러 가기도 하곤 하였다.
그땐 대하가 몸통이 굵고 컸는데 지금의 대하는 그냥 바닷새우 만큼 크기가 작아졌다.
다 크기전에 미리잡아서 그런건지...
종자가 멸종이 되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유전자가 변형 이 되어서 그런건지...
암튼 이유는 모르지만....
아쉽게도 말만 ‘대하’지 예전의 ‘대하‘ 는 아니었다.
사무실이 충청권에는 보령 에도 있었는데, 보령지부 의 업무 는 충북 일원 까지 관할을 하였다.
업무 가 바쁠땐 서산지부나, 보령지부 나 서로 업무지원 을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옥천 대청호 , 단양 충주호 까지 업무 지원을 나가기도 하였다.
심지어 영동 심천 지탄 까지 금강줄기에서 그물로 고기잡는 무동력뗏마
검사 까지 하고 오기도 하였다.
이럴땐 사실 말이 검사지
등록선 이 바뀌지 않았는지 실체확인 이 더 중요하다.
운전하여 가는시간이 몇시간 걸려서 가면 검사시간은 30분 정도면 끝난다.
내수면 등록선 은 바다의 어선과는 좀 다른환경 에서 운항을 하다보니
선주들 스스로 정비 는 잘 하지 않는편 인거 같았다
등록치수 와 같은지 실체 확인하고
엔진시동 걸어봐서 스크류 잘돌아가고
소화설비.구명동의 등 안전장구 이상 없으면 합격인데
때때로 정비불량 등 지적사항 이 나오면 추후 임시검사 지적 하고 돌아온다.
돌아올땐 대전집 에 들려 아이들하고 함께 짜장면 한그릇하고
다음날 새벽에 일찍 집에서 출발하여
사무실로 정시 에 출근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매일 장시간 운전기사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던 어느날
부산지방검찰청 에서 참고인 신분 으로 출두 하라는 소환장 이 날라왔다.
출두날짜 에 맟추어 도착하여 보니 대기실 에는 당시
부산지부 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 기관검사원 들이 모두 미리 와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하여 자세히 알아본결과...는 이러했다.
당시 선박용 중고엔진 은 수입금지품목 이었는데
고철수입업자 들이 일본에서 선박용중고엔진을 고철로 수입을 하여서
엔진을 시중 각 철공소 수리업체 로 불법유통을 시킨게 문제 의 발단이 되었다.
선박검사 의종류 중에는 ‘예비검사’ 라는게 있다.
선박에 들어가는 모든설비 또는 부품 들은 미리 예비검사를 득한후 선박에 설치 하게되어있다.
엔진도 마찬가지이다.
보통 철공소 수리업체에서 는 엔진을 모두 개방하여 정비하여 놓고 ‘예비검사’를 신청하는데,
가보면 이엔진 이 어느배 에서 떼어낸건지...
아니면 막말로 밀수하여 들어온 엔진인지...
우리로써는 이엔진 의 출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검사신청 이 접수되면 현장에가서
Name plate 상에있는 Maker 와 Type을 확인하고,
검사지침 에있는 사항을 체크하고 ,
마모량이 많으면 새것으로 신환하고,
조립하여 시운전 해보고,
이상없으면, ‘예비검사증서’를 발행 하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불법유통 된 밀수엔진 을 검사 해줬다 는게 죄목 이었다.
이사건이후 본부 에서는
수리업자가 예비검사 신청할때는 그엔진에 대한 ‘출처증명서’를 첨부 하여야
접수를 받아주는걸로 제도를 개선 하였다.
그때 우리는 사안에 따라 징계가 내려졌는데
나는 감봉3개월 의 자체징계처분 을 받았다.
당시 해난사고 의 통계를 보면 오래전에 건조 되었던 목선 으로된 노후어선들 의
해난사고 가 해마다 증가 하는 추세 에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부 에서는
노후어선을 폐선조치 하고 신조어선 으로 새로 건조 하는 어민 들에게
건조자금을 융자 내지는 보조 를 해주는 제도 가 있었다.
이게 소위 ‘노후어선대체사업’ 이라고 하여 ‘목선’ 말고 ‘FRP’ 어선 으로
신조 하는 어민 에 한해 지원을 해주는 제도였다.
이 제도 는 당시 ‘어선협회’ 에게는 너무나 큰 허점 과 리스크 가 잠재해 있는 제도 였다,
검사원 들 에게는 해줄수도, 안해줄수도 없는 너무나 뜨거운 감자 였다.
법 이나 시행령 을 하나 바꾸려면 국회까지 올라가야 하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지금은 개선이 되었나 모르겠다.
어선의 등록 은 도.시.군.구. 수산과 에서 담당을 하는데
노후어선대체사업 신청을 하려면 각 수산과 에다 신청을 한다.
그러면 수산과 에서는 ‘어선검사증서’ 유효기간 이 지난서류 는 접수를 안받아주고
유효기간 안 에있는 서류 만 접수를 받아준다.
여기서부터 그 골치아픈 문제 의 발단이 시작된다.
첫째.(수산과) 는 폐선직전의 운항 불가능 한배 에대하여
정말 어민들을 지원해주려는 순수한 마음 이 있다면
어선검사유효기간 이 지났어도 따지지 말고 접수를 받아주던지.....
둘째.(어선협회) 는 어민들 이 노후어선대채사업을 접수 한다고 하면
어선검사증서 의 유효기간을 검사받지않고 그냥 서류갱신신청 만으로
새로 발급해 주던지....
하면 될 것을...
수산과 에서 는 어민에게 말하기를 “어선협회에 가서 유효기간 이있는
새로운 어선검사증서를 받아와라” 하고...
어민은 어선협회에 와서 사실을 설명하면....,
어선협회는 검사를 받아야 새로운 어선검사증서 가 나온다고 하니...
어민은 검사접수 를 하고 돌아간다.
검사원은 이 어선의 사연도 모른채 접수배당을 받고 현장에 가보면 이때 어민 이 자초지종 설명을 한다.
이때 검사원은 딜레마에 빠지게된다.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맹점 의 제도 를 너무나 잘 알고있는 우리들은 이런민원 이 재수없게 걸리면
결정 은 본인이 해야하고, 책임도 본인 이 져야 한다.
어민 의입장에서 볼 때
해주면 새로운 FRP신조어선을 건조할수 있게되었으니 좋은검사원 일테고...
안해주면 모처럼의 정부지원을 받아 배를 새로 지어보려는 기회 를 없애버리는 나쁜검사원 이 될테니 말이다.
나도 드디어 이런 재수없는 케이스 에 딱 걸리고 말았다.
검사신청 이 접수되어 현장에 가보니 배는 없는건 아니고,
운항 안한지는 오래되었고, 인천 덕적도 에 배가 있기는 있다는 것이었다.
노후어선대체사업을 신청하려고 서류를 인천 덕적도에서 사왔다고 했다.
예기인즉 그동안 목선으로 물도 새고 고생을 좀 햇는데
이번에 FRP 로 새로 건조 하고 싶어서 서류를 사온것이니, 운항하는게 아니고
새로 신조 하는데 필요한 서류 이다보니, 별문제 없을거라 하면서 애로사항을 털어 놓았다.
만약 통과가 안될 경우...
이 어민은 배 도 새로 건조도 못할테고,
비싼 돈들여 사온 서류 는 또 어쩔것이며,
앞으로 뭘로 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생계문제 가 달려 있는 사안 이었다.
암튼 수산과 에 접수만 하는데 필요한 서류 이다 보니 발급해주지 않을수가 없는 실정 이었다.
나도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어민의 앞날을 위하여 신조 하는데 도움을 주기로 하고 ,
수산과 에 서류를 접수 할수 있도록 새어선검사증서 를 발급해 주었다.
옜말에 병은 자랑을 하라고 하는 말이 있다.
당시 나는 한가지 내가 가지고 있던 병을 치유하게된 계기 에 대해
자랑 아닌 자랑을 좀 하나 해 볼까 한다.
사람은 항문병 을 가지고 있으면 대개는 부끄러워서 누구에게 말하기를 꺼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항문병 의 종류 에는 암치질.수치질.치루.탈항.등이 있는데 , 나는 치루 를 앓고 있었다.
그전에 배타면서 1기사때 배에서 생겼는데 처음엔 그증상이 뭔지 몰랐었다.
어선협회 에 근무 하면서 어느날 서점에 들리는 일이 있었는데
그병원 원장님 이 쓴 항문병 에 관한책 을 발견하고 사서 집에 가지고왔다.
처음부터 죽 읽어보니 나의 증상은 치루 라는 항문병 이었고,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그병원 을 찾아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2개의 구멍이 있으며,
한개의 구멍은 깊게 뻗어있다고 하였다.
바로 결정을 하고 시술을 하였다.
방법이 좀 특이 하였는데, 고무줄 로 구멍을 통해서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어 묶어서 1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들려서 새로 묶어주기만 하면 되는 방법 이었다.
수술칼로 괄약근 을 도려내는게 아니다보니 피가나지 않으니 바로 집으로 와서 일상생활 을 하였다.
처음엔 좀 견딜만 하더니 몇일이 지나니 좀 우리--하게 아프기 시작 하였다.
아프다고 하니까 낫느라고 아픈거란다.
아파야 낫는다니 참을수 밖엔 없었다.
그렇게 한 2개월정도 지나니까 드디어 고무줄이 살을 끊고 나왔다.
고무줄은 살을 끊고, 뒤에서는 새살이 차나오는 그런 방법 이었다.
그전에 여러군데 다녀도보고, 좋다는 방법도 써 보았지만 완치 되지는 못했었다.
암튼 나는 이 원장님 에게서 시술을 받고 치루 를 완치 하는 기쁨 을 누렸다.
요즘 은 테레비 에서 명의 라는 프로그램 이 있어서 어느병원 에서 뭘 잘 치료하는지
여러 정보채널 이 있지만 , 그땐 어딜가야 이걸 치료 할수 있는건지 정보 가 별로 없었다.
병의 치료는 실력있는 의사 를 만나는것도 복 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 의 시간 이 흘렀을까?...
어느날 인천지방검찰청에서 참고인 조사차 출석 통보서 가 날아들었다.
이또 무슨일이 있어서 오라는걸까? 궁굼하기 짝이 없었다.
가보니 새삼스럽게도 전에 노후어선대체사업 신청 하려고 접수 를 하였던
어민 이었는데,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의 일로 인하여
서류를 산사람 과 판사람 사이에 고소 하는 사건으로 변해 있었다.
판사람이 전에 수협에서 대출을 받은게 있었는데 이거 까지 산사람 보고 갚으라고 하고...
산사람은... 니가 대출받아서 다 써놓고 그돈을 왜 나보고 갚으라고 하냐.
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와중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판사람이 나 까지도 검사가 안되는배 검사해줬다고
함께 엮어서 검찰에 고소한 사건 이었다.
나는 사실대로 노후어선대체사업 에대한 서류접수 부분에 있어서
어선협회 의 애로사정 을 설명을 하였고,
이점 이 인정되어 진술을 끝내고 돌아왔다.
운항하는배 를 이렇게 검사를 통과시켜 줬으면 직무유기 로 법의심판 을 받아야 할뻔 하였다.
인천에서 돌아온후....
갈수록 밤만되면 계속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천사건 이후 현재의 직장에 대한 회의감 같은게 자꾸 느껴졌다.
한직장에 근무하면서 2번씩 이나 검찰 에 불려갔다온다는게 스트레스 가
갈수록 쌓여만 같다.
앞으로 또 무슨일이 일어날지...
여러날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배타기 싫어서 남모르는 노력으로 공채 에 합격하여 들어왔던직장...한국어선협회.
난 집사람에게도 상의한번 없이 과감하게 결정을 하고 정든 회사 를 뒤로하고 미련없이 나와 버렸다.
그리고 한성조선소 에서 영업부장 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우연히 사무실 테이블 에 있던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조선일보 신문광고 에 경력사원모집 한다는
구인광고 하나 가 눈에 들어왔다.
대우중공업 에서 루마니아 망갈리아 조선소 에서 근무할 경력직원을 모집
한다는 구인광고 였다.
나는 밑져야본전 이다 싶어 별생각없이 응시원서를 접수하고 몇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후
면접 인터뷰 하러 오라고 대우중공업 에서 연락이왔다.
가서 보니...면접 이라고 해봐야 이부서 저부서 돌아다니면서 사람 인사하는게 인터뷰였다.
그리고 또 몇일 을 기다리니
최종입사가 결정 되었으니 5월12일 출국예정이니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하여 가족들은 한국에 남겨둔채 1999년5월12일
입사동기4명이 함께 동유럽 미지의 나라 루마니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나 루마니아 에서 의 생활 이 그렇게 시작 이 되었다.
- 제13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