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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열 의 자서전 제12부

김홍열 의 블로그 2018. 4. 23. 08:08

1988925일 미국 뉴 올리언스에서 중간귀국 을 하고,

언제 모집공고  가 나오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1988년11월17일 자 서울신문 에 모집공고 가 나왔다.



그동안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육상근무를 하기위한 첫발을 내딛기 위해

88년11월23일 ‘특수법인 한국어선협회에 응시원서를 접수 하였다.

막상 신문을 보니 기관검사원 은 2명을 뽑는다고 나와 있었다.

치열한 경쟁 이 예상되었다.

응시자 중 에는 진짜 실력파 도 있을테고

배타기 실어서 괜히 한번 응시해 보는 사람도 있을테고

나처럼 진짜 죽기 아니면 살기 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비한 사람도 있을테고

과연 결과 는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가슴이 설레이고,

밥맞도 없고,

잠도 안오고,

연일 스트레스 가 보통 쌓이는게 아니었다.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먼훗날 집사람 이 예기 하는데 집사람도 나름데로 긴장 했다고 한다.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 을 보고 간절히 기도 도 했다고 도 했다.

그래도 접수후 시험볼 때 까지 문제집 을 열심히 풀고 밥만 먹으면 달달달 책을 읽었다.

한국에 귀국해서 TV를 보니 당시 전두환 대통령 에 대한 ‘5공청문회가 연일 방송 에 나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 의 기억 이 남는건 장세동 씨 의 그 름름한 자세 가 지금도 기억 에 선하다.

서슬퍼런 청문회 가 매일 진행 되다보니 전반적인 사회적 공직사회 의 분위기가 서로 몸조심 하느라고,

그야말로 그 누구에게도 무슨 부탁 내지 청탁 같은 것은 아예 통하지가 않았다.

그전에는 거의 누구누구 권력 이 있는 사람들 의 추천 에 의해서 모집 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에는 거의 모든 다른 직장 들도 소위 있는자 들의 출세길 이 보장 되던 시절 이었다.

 

요즘은 정말로 세상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긴한데

아직도 정부 고위직 정치인들 에 의한 인사청탁 이나

채용비리 가 아직까지도 있는 모양이다.

연일 뉴우스 를 장식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하는말 인데

모집공고 를 자세히 보면 한국어선협회 공고 제1라고 되어있다.

사람 은 누구나 인생 을 살다 보면 3번 은 기회가 온다고 한다.

나는 어찌 보면 ‘5공청문회의 덕을 본 사람 이라고 할수 있다.

그 이유 는 청문회 때문에 당시 권력 있는자 들의 몸사리기 작전 으로 인하여 그 누구도 추천 또는 청탁 이 전혀 없었다고 훗날 누군가 예기 하는걸 들었다.

만약, ‘5공청문회가 없었더라면, 그전 처럼 또 있는 누군가 가 추천을 받아서 나대신 합격 을 했을거라 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때 순전히 실력으로 함께 합격했던 우리 입사동기 들은 나름 자부심 이 있었다.

한국어선협회 공채 1기생으로써 타의 모범 이 되는 근무를 하였다 고 생각한다.

 

드디어 필기시험 보는날!

문제지 를 받아보는 순간 죽 훑어 보니 그동안 공부 한데서 아는 문제 들이 많이 출제 가 되어서 편하게 시험을 치렀다.

필기 를 합격하고,

면접 까지 무사히 마치고,

이제 최종 합격자 발표 만 남겨 놓았다.

주사위 는 던져졌고,

합격이 되면 좋고, 떨어져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라고 위안을 스스로 해 보기도했다.

하루 이틀 눈이 빠지게 얼마 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 이 이또한 사람 애간장을 태웠다.

얼마를 더 기다리니 드디어 한국어선협회 로부터 한통 의 등기 우편 이 도착 하였다.

뜯어보니......

최종 합격 통지서

였다.





뛸듯이 기뻤다.

세상 이 달라져 보였다.


이번에는 오히려 너무 기뻐서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그동안 승선중 에 짬짬이 공부하고 노력한 보람 이있었다.

학교 졸업 후 처음 승선하여 죽도록 고생 하였던 참치잡이 배 원양어선인 해창18...

인도양 에서 사이클론 을 만나 죽을뻔한 지옥에서 살아나온 나탈리호....

순간 만감 이 교차 하였다.

이젠 그런 걱정 이 없으니 얼마나 감개무량 한지

지난 추억 이 감사했다.

그동안 떨어져 지내며 알게 모르게 고생 했던 집사람 도 나보다 더 좋아했다.

얼마후 정식 으로 임용 이 되고

본부 에서 198931일부터 8일 까지 연수교육 을 받았다.

그리고, 198939일 자로 첫 부임지 제주도 로 발령 이 났다.

직원 으로는 지부장. 행정원.행정보조2.선체검사원2,기관검사원2,기사1. 모두 9명 이었다.

위치는 제주시 동문 로타리 부근에 제주상호신용금고 2에 사무실 이 있었다.

청양 처갓집 에서 제주도 로 집사람 과 강석.강민 을 데리고 이사를 하였다.

제주도 에는 이상한 풍습 한가지 가 있는데,

이사철 이 되면 신구간이라는 날짜 를 한1주일 정도 정해 놓고

그 기간 에 제주도민 전체가 한꺼번에 이사를 가고 , 이사를 오고, 한다.

나도 그기간 에 맟춰서 칠성통 에 월세를 얻어 이사를 와서 꿈에그리던 첫 육상근무 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학교졸업 후 죽 배만 타다가 아침.저녁 으로 출퇴근을 하다보니

처음엔 좀 어색하기도 하고, 아직 실감 이 나지 않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퇴근 하니 집사람 이 맛난 저녁밥상 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행복한 시간 이었다.

 

관할구역 은 제주도 일원 과 추자도 까지 업무관할구역 이었다.

제주도 각 항포구 와 지리적 도로 를 파악 하는데 주력을 하였다.

제주도 도로 중 에는 슬프고 기가막힌 사연이 있는 도로가 하나가 있다.

제주시 에서 서귀포 로 넘어가는 도로 중에 성판악을 거쳐가는 ‘5.16도로라는게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에 구치소 에 있던 죄수 들을 데려다가 중장비 지원 하나없이 마치 열대지방 밀림숲 같은 지역을 순전히 맨손으로 작업하는 ,곡괭이 와 삽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들 의 피눈물 나는 노고 가 참 대단 하다고 생각이 든다

처음엔 울퉁불퉁 열악한 도로였지만,

후에 확장 이되고,

아스팔트 로 포장 이 되고,

지금은 제주도 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로가 되었다.

5월 엔 한라산 으로 전직원 등산 단합대회를 하기도 했다.

영실코스 로 입산하여 정상에 도착해 보니 사진 으로만 보던 백록담 이 눈앞에 있으니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후로 아직 백록담 에 다시 가보지 못했는데,

더 늙기 전에 한번 기회를 만들어 가보고 싶다.

신분 이 준공무원 신분 으로써 공적업무를 하다보니 행동에 조심스러운 부분 들도 많았다.

제주도 가 관광지 이다 보니 아는분들이 육지에서 관광 왔다가 그것도 언제 간다고 미리 예기하는것도 아니고 도착해서는 예고없이 갑자기 연락이 와서 입장 이 아주 곤란 할 때 가 한두번 이 아니었다.

모처럼 제주 에 와서 연락 하는데 안나갈수도 없고,

그러자니 미리 선약 했던곳 은 약속을 깨야하고...

하여튼 초기 에는 손님접대 하느라 애로사항 도 참 많았다.

과장법을 좀 쓰면 사돈의8까지도 연락 이 왔다.

처음엔 반가운 마음에 서부두 횟집 에가서 멋지게 대접도 하곤 했는데,

으레 생색을 내며 횟값은 내가 지불을 하곤 하였지만

그러자니 이게 횟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나에겐 부담 으로 돌아왔다.

얼마 가 지난 후부터 는 연락오면 모두 만나지 않고 선별하여 적당히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았다.

요령이 생겨 출장가야 된다고 핑계를 대곤 하였다.

마음 이야 다 반가운 사람들 이지만 다 응대를 하자니 물심 양면 으로 피곤 하였다.

손위 둘째 처남께서 승용차를 구입하면서 타시던 오토바이 를 공짜 로 선물 을 받았는데 이걸 제주 로 가져와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 하였다.


온가족이타고 들로,산으로,바다로,돌아다녔던 오토바이...

당시 승용차 가 없던 나에겐 기동성 이 매우 좋은 교통수단 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 이 어리다보니

내앞에 막내. . 큰애. 집사람.이런순서 로 일가족4명 이 일요일 이면 오토바이 한 대 에 다타고 이곳저곳 잘도 돌아다녔다.

지금이야 안전 때문에 못타게 할테지만,

그땐 도로 에 차도 별로 없었고

그렇게 돌아다녀도 누구하나 말하는사람 도 없었다.

자연환경 이 오염 되지않고 같은 한국 이지만 다른나라 의 별천지 같은 섬 이었다.

지금 은 차고 넘치는 중국인 관광객 때문에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 가 되어 버렸다.

추자도 로 출장 을 갈때는 제주 - 목포 간 운항 하는 여객선 으로 들어갔다가,

나올때는 제주-추자도를 운항하는 헬리콥터를 타고 나오기도 하였다.

성산포 일출봉 에서는 헬리콥터 관광 상품 이 있었는데

신혼부부 를 태우고 관광을 하던 헬리콥터 가 절벽 에 너무 근접비행을 하여 날개 가 암벽에 부딭혀 추락 하는 사고 이후 운항 이 금지 되었다.

아이들 이 제주 북초등학교 에 다녔는데 아이들끼리 친구 가 된 것이 어른들 끼리 도 친구 가 되어 지금 까지도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는 가족 이 있다.

추자도 로 여름방학 엔 가족끼리 휴가 를 함께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 가족 하고는 저녁이면 함께 어울려 생맥주도 마시고 오예하며 칠성통을 누비고 다녔고,

탑동 에 있는 무진장횟집에서는 회를 무진장 먹기도 하였다.

출장 갔다가 소라를 좀 얻어 왔을땐 우리집에 불러서 소라를 삶아서 술안주 하며 밤12시가 넘도록 한라산소주를 마시던 추억이 생각난다.


내가 세들어 살전 주인집 예기 를 좀 해야겠다.

그 남자 주인 의 술버릇 이 참 희안한 사람 이었다.

술을 안마시면 평소에는 내얼굴도 쑥쓰러워 제대로 못쳐다보는 사람인데

저녁만 되면 어디서 술을 한잔 걸치고 와서는 마누라에게 술주정을 하며 마누라 를 들들 볶아댔다.

어느날 인가 보니까 대문에 딱 들어오는순간 신고있던 신발을 벗더니

대문 에서 집 거실로 향하여 신발을 냅다 집어던지며 여보!’ 를 외쳐 되었다.

그사람 술마시고 오는날 은 집주위 가 온통 시끄러웠다.

훗날 들려오는 소식을 들어보니 결국 그 부부 는 이혼을 하였다고 한다.

제주도 주위 에는 제주도 소속 섬 들이 제법 몇개 된다.

추자도, 우도, 비양도, 가파도, 마라도,...

모두 사람 이 살면서 주로 어업 에 종사 를 하고 있다.

제주도 는 철마다 또 지역마다 다르게 고기 가 잡힌다.

방어,복어,한치오징어,갈치,옥돔,자리돔,삼치,조기 등이 주로 어획 이 되고 있다.

제주도 사투리 는 들을수록 신기하고 생소한 단어가 많아 이해 하기가 어렵다.

햇볕 은 쨍쨍 모래알 은 반짝을 제주도 사투리로 말해 보면..

빗은 과랑과랑 모살 은 빈쯕이다.

제주도 는 화산섬 인데 솟아나는 생수 는 참 으로 물맛 이 일품이다.

모든 생활 필수품 은 육지에서 들여와야 하기 때문에 가격은 육지보다 좀 비싼 편이다.

제주도를 가기 위해서는 항공편 과 선박편 이 있는데,

선박편 은 인천,목포,완도,부산에서 출발하는 여객선 편으로 들어 갈수 가 있다.

인천에서 출발 하던 세월호 사건 이후,

인천에서 가는 다른 여객선 이 계속 운항 이 되고 있는지 는 잘 모르겠다.

그때 함께 근무했던 행정원 은 술 을 참 좋아 하는 사람 이었는데

하루는 저녁 에 직원들 회식 이 있었다.

1차 로 식당 에서 저녁을 먹고 각자 헤어졌는데,

다음날 출근 할때 보니 행정원 얼굴 이며 옷차림새 가 이상했다.

얼굴 은 온통 모기에 띁겨서 벌겋고,

옷은 흙투성이 로 범벅 이 되어 있었다.

알고봤더니 2차로 술을 한잔 더 하러갔고, 술에취해 집에도 못가고 동문로타리 에 있는 동문시장 입구 길바닥에서 잠들었던 모양이다.

아침 에 정신이 들어 보니 지갑도 없어지고 차비 도 없고 집에갈 염치도 없고 아예 그길로 사무실로 바로 왔단다.

재미있었던 추억 의 한페이지 였었다.

한번은 사무실에 도둑이 들은 사건도 있었다.

그날따라 나도 지갑을 책상 서랍에 넣고 왔는데 다음날 출근 하여보니 사무실 이 온통 난리가 났었다.

내지갑 도 없어지고 사무실 금고도 열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열지는 못하였다.

몇일후 서울 남대문 시장 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왔는데

도둑놈 이 어디서 훔친 100만원짜리 수표를 사용하면서 뒷면에다

훔쳐간 내 주민등록증 신상정보 를 이서를 한 모양이었다.

옷을 사고 나머지 는 현찰로 받아 갔다고 한다.

가게주인 이 수표를 은행에 가지고 갔더니 도난수표 로써 지급정지 된 수표 였단다.

도둑이 잡혔는지 그후 소식 은 모르겠다.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미등록어선 일제정비기간' 에는  목포자부 와 완도지부 로 파견근무 를 나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어느듯 3년 이란 세월이 흐르고 그동안 정들었던 제주도 생활을 1992216일 자로 마감을 하였다.

 

부산지부 로 발령 나다

1992217일 부산 영도 에 있는 사무실로 첫 출근을 하였다.

인사이동 에 따른 첫 상견례를 위하여 저녁에 단체 회식을 하였고

각자 자기소개 시간 이 있었다.

직원으로는 지부장.차장.총무.행정원.행정보조2.기사.선체검사원6,기관검사원6.

모두18명 이 근무를 하였다.

제주도 보다 직원수 가 배나 많았다.

사람이 많다보니 민원접수 하러온 선주 들까지 겹쳐서

아침 출근시간 엔 사무실 통로 가 공동어시장 처럼 늘 시끌벅적 하였다.

전날 접수된 검사물량 이 각 검사원 앞으로 배정이 되면,

우리 는 검사장비 를 챙겨서 현장으로 출동을 한다.

당시 검사의 종류를 열거 하자면, 정기검사.중간검사,임시검사,제조검사,예비검사 등이 있었다.

 

정기검사 : 4년마다 정기적 으로 받는검사

중간검사 : 정기검사 중간 에 2년 마다 받는검사

임시검사 : 지적당한 것을 받는검사

제조검사 ; 선박을 새로 신조선 할때 받는검사

예비검사 : 선박 에 들어가는 부품 또는 완성품 에 행하는검사.

 

여기서 잠깐 한국어선협회 의 설립동기를 살펴봐야겠다.

1975년겨울, 76년겨울, 동해안 명태잡이 어선들 이 출어 했다가 기상 이 갑자기 나빠져서 거친 풍랑 속에서 많은 소형 어선들이 연달아 전복 침몰 되는 사고 가 있었다.

이때 많은 어부들 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 사고 이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의 특별지시로 어선에 대한 안전문제 가 거론되어 일본어선협회를 롤 모델 로 하여 협회 설립 의 기초 가 되었다.

한국어선협회설립.

19771231일 어선법 제정 공포.

동법 제21조 규정에 의거

19791특수법인 한국어선협회’ (비 회원단체)가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어선협회는 어선의 정부검사업무 대행과 기술개발 및 연구사업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지부 관할지역 으로는 부산광역시일원.양산.울산 까지 가 업무관할지역 이었다.

부산으로 이사를 올 때 어디에다 집을 얻을까 집사람 과 상의를 하였는데

영도에 집을 얻으면 내가 출퇴근 은 편리한데, 집사람은 동래쪽으로 얻고 싶어했다.

내가 양보를 하여 남산동 에다 집을 얻었다.

아이들 은 청룡초등학교 로 전학을 하였다.

당시 나의 출퇴근 방법 이 좀 특이 하였다.

남산동에서 지하철 로 시청앞 까지 타고가서,

지하철 역 출구쪽 가로수 은행나무 에다 쇠사슬로 묶어두었던 오토바이를 타고, 영도다리를 지나 사무실로 출근을 하였다

반대로 퇴근때는 오토바이를 사무실서 타고와서 다시 가로수에다 묶어두고 지하철 로 집에왔다.

지하철역에서 영도 사무실 까지는 걷자니 좀 먼거리 였고, 시내버스 노선 도 안맞았고, 그렇다고 매일 택시를 탈수도 없는노릇 이었다.

1년여를 이렇게 출퇴근을 하였다.

그나마 나는 오토바이 가 있어서 그걸타고 검사업무 현장 까지 기동성 있게 다녀 올수가 있었다.

부산 은 차가 막히는 시내지역을 자주 통과 해야했고, 업무지역 이 광범위 하여 기동성 이 있어야 했다.

그 무렵 한국의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My Car 시대 가 오고 있었던 시점 이었다.

직원들 도 하나 둘 차를 구입 하는 사람 이 생기기 시작 하였다.

나도 차를 하나 구입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현대자동차 중고 프레스토를 150만원 에 주고 샀다.

처음 구입한 150만원 짜리 중고 프레스토 승용차!...

고속도로서 최대시속120km/h 밖엔 안나갔다.

이때 기분도 삼삼 하게 좋았다.

나도 드디어 마이카 대열에 들어섰으니,

주말이면 부산인근 이곳 저곳 으로 가족 나들이를 다녀 오곤 하였다.

차가 있으니 생활 패턴 이 달라졌다.

가고싶은곳 이 있을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어디든 시동을 걸고 즉시 달려 갈수가 있었다.

차가 생겼으니 이제 출퇴근 노선 은 구서동에서 문현동 까지 연결 되는

도시고속도로 를 이용 하였다.

사무실 운동장 에 주차시키는 직원들 의 차 가 한대, 두대 늘어 나면서

직원 상호간 에 대화 의 주제 가 한동안 은 내차는 어떻고 네차는 어떻고 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시간 이 많아 지기도 했었다.

직원중 모 검사원 은 운전할 때 실내화를 신고 운전하는사람 이었는데

하루 는 운동장에 그양반 차는없고 구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퇴근할 때 차 실내화 로 바꾸어 신으면서 구두를 밖에 벗어놓고 그냥 문닫고 휭 가버린 것이었다.

차 지붕위에 서류가방 잠깐 올려 놓았다가 그냥 출발해서 가방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고,

타이야  가 빵꾸 가 나도 못갈아 끼우는 사람도 있었다.

'박'모 검사원 은 할부 로 새차를 빼와서 는 운동장에서 고사 지내고 

좋다고 그날 퇴근 하다가 사고 를 낸 사람도 있었다.

마이카 시대 에 들어서면서 초창기 재미난 애피소드 도 많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자동차과 를 나와서 차에 대해 어느정도 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 은 승용차 가 생소 하였을 것이다.


직원 중에 차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 이있었는데,

이양반 이 또 재미난 사람 이었다.

직원들 잘못한 내용만 자기 다이어리 에다 빼곡이 적어논게 우연히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때는 직원 들이 돌아가면서 숙직실에서 저녁에 숙직을 서던 시절 이었다.

당시 숙직을 서던 사람 이 차장책상 위에 펼쳐진채로 있던 다이어리를 보고 읽어보니 직원들 안좋은 내용만 죽 적혀 있더라는 것이다.

그게 알려 지면서 그날이후 그 차장은 소위 왕따를 당하는 신세 가 되었다.

퇴근할 때 책상 위에는 깨끗이 치우고 퇴근하게 되어있는데

그양반 잠시 외출 했다가 들어오지도 않고 그냥 퇴근 한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암튼 적혀있던거 알려진거 보면 유치한거 만 적었다.

출근을 늦게했다. 졸았다, 큰소리로 떠들었다. 책상서랍 살살 안닫고 크게 탁탁 닫았다, 껌을 짝짝 씹었다, 등등...

옜날 중학교 학창시절 에 반장 이 적어서 담임 선생님 에게 제출하여 명단에 있던 학생들 은 혼이 나기도 했었는데 그 생각이 절로 났다.


여기서 잠깐 당시 민원인 들이 부르는 '선박 검사원' 에 대한 호칭 에 대해 재미난 애피소드 를 좀 이야기 해 볼까한다.

민원인들 은 '선박검사원' 을 부를때 '원' 자 는 빼고 그냥 '검사' 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다른 직종 의 검사원 들 도 민원인 들이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특히나 선박직종 의 검사원 은 민원인 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늘 우리 를  그렇게 불렀다.

옜날부터 호칭 에대한 관행 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부산 남항 에 계류된 쌍끌이 기선저인망 검사 를 마치고

충무동 다방에 들려 시원한 차한잔 을 마시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선주 는 계속 나를 부를때 마다 '김검사님' 이라고  불러 대었다.

근데 공교롭게도 옆 테이블 에 경찰복장 을 한 사람 과 평상복 입은 사람 이 앉아 있었는데

말끝마다 '김검사님' 하고 불러 대니, 그들이 자꾸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결국은 그들은 내눈치 를 슬슬 보더니 차를 다 마시지도 못하고 바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호칭문제는 좀 민원인들 스스로 '원'자 를 끝에 붙혀서 불러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검찰청 검사 쯤 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부산지부 에 근무 를 하면서 현장 에 자주 돌아다니다 보니

전에 함께 승선했던 옜 동료들 을 오다 가다 우연히 길거리 에서 또 현장 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다.

이름 까지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다.

- REINA NAVEGANTE 호 선 장 : 영도 길거리에서  만났는데 당시 연세 가 좀 드셨는데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 REINA NAVEGANTE 호 2기사  : 모 수산회사 총무 로 근무 하고 있었다.

- 원양어선 동원909호 갑판원 : 충무동 냉동 공장 에서 지게차 운전 하고 있었다.

- 원양어선 해창18호 갑판원 : 충무동 남항 에서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 먹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한번 은 저녁에 회식 이 있었는데 부산역 주차장 에 차를 파킹 시키고 회식 에 참석 하였다.

그날따라 2차 로 자리를 옮겨 한잔 더 마시는 자리가 되었다.

아침 에 일어나 차 찾으러 좀 일찍 출근 하려고 대문을 나서는데

부산역 주차장 에 있어야 할 차가 대문 앞에 떡 버티고 있는게 아닌가?

당시 엔 대리운전 도 없던 시절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술취해서 차를 내가 몰고 온게 분명했다.

기가막히고, 눈앞이 깜깜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일을 계기로 정말 스스로 많이 반성,반성,반성 하였다.

그날이후 음주운전 은 안하고 있다.


주말이면 가족 들을 오토바이 가 아닌 승용차 에 태우고 부산근교 로 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지금 은 부산신항이 들어서고, ‘거가대교개통 으로 이 육지 와 연결 이 되어 다니기가 쉬워진 가덕도가 있는데,

당시엔 용원에서 선외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이었다.

20노트 의 속력 으로 달리는 선외기를 타고 바다를 달리면,

피부에 와닿는 바닷바람 이 아주 상쾌 한데

집사람 은 그때 선외기 타고 가덕도 들어갈 때 아주 재미 있었다고,

이야기를 지금도 가끔 한다.

진해 벛꽃축제 때는 벛꽃놀이 한번 가려다 중간 에 차가막혀 같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도로 집으로 돌아온일 이 있었는데 그이후 아직 진해 벛꽃놀이 는 한번도 못가보고 말았다.

경남 양산군 대변항 에는 봄이면 멸치잡이를 많이 하는데 그때 거기한번 갔다가 그이후로는 위생상 멸치젓 을 별로 안좋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변항내 에서는 멸치어선 들이 접안 하여,

선원들이 잡아온 멸치 를 그물 의 멸치털기 작업 을 하는데,

배주위 인근 식당에서 흘러 나오는 생활하수 가 그대로 방치되어

항내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선원 한사람 은 멸치를 털다 말고 어선 화장실 로 볼일 을 보러 간 모양 이었다.

그사람 이 화장실에서 볼일본 대변덩어리 가 대변항으로 바로 빠져

나와서 둥둥 떠다니더니 멸치터는 그물로 들어가 멸치와 함께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장면을 보고난 그후로는 나는 멸치젓 먹어본 기억 이 없다.

지금도 항내에서 그런식 으로 멸치를 터는지

국민건강상 비 위생적 일수밖에 없다.

생활하수 가없고, 오염되지 않은 좀 깨끗한데서 멸치를 털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오토바이 를 주셨던 손위 둘째처남 은 아들이 3형제 가 있었다.

당시 손위 처남 은 대전서 서기관 으로 근무 할 때 였는데

어느날 부산 에 볼일 보러 왔다가 우리집 에 겸사겸사 잠깐 들렸었다.

부산 에 모처럼 오셨으니 해운대 로 점심먹으러 갈려구 막 대문을 나서는데 안양 처제 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째 가 교통사고 로 사망하여 지금 대전 어느 병원 영안실 에있으니,

오빠 에게 잘 이야기 전달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사실 은 사실 아닌가?

나는 형님 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전달해야하나?

순간적 으로 고민 이 되었다.

할수없이 말을 꺼내야만 했다.

 

형님, 철희 가 지금 오토바이 타다가 넘어져서

손가락 다쳐서 지금 어느 병원 에 입원 해 있다고 하니

그냥 간단히 요앞에 중국집 에가서 짜장면 이나 한그릇씩 하고 올라 가시죠

 

그려? , 걔 오늘 졸업 시험 보는날 인데?”

 

그렇게 짜장면 으로 점심을 때우고 바로 대전으로 출발 하셨다.

나도 다음날 바로 월차를 내고 대전 으로 향하였다.

가서 자초지종 예기를 들어보니....

이건 뭐 철희가 잘한게 하나도 없었다.

내용인즉 은...

1. ‘헬멧을 안쓰고 왼쪽 팔뚝에 걸치고 간점

2. ‘차선을 안지키고 1차선 으로 간점.

3. 앞차와의 안전거리를 안지키고 바짝 붙어 간점.

4. 앞차가 사정 에의해 급정거하니 앞차를 들이밭고 중앙선을 넘어

반대차선으로 튕겨 나갔는데 마주오던 승용차가 정면으로 들이받아

뇌진탕 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1. '헬멧' 만 썼었더라도.....

2. 차선만 '2차선' 으로 갔었더라도.....

3. 앞차와의 '안전거리' 만 두고 갔었더라도....


철희 의 운명 은 여기까지 였었나보다!.....

명절때 가되어 청양 처갓집 에 식구들이 모였을때 장모님 은 철희 가 왜 안보이느냐고 물으셨고

우리는 철희 지금 외국으로 유학 가서 몇년 있다가 올거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건 보험처리 도 안될뿐더러 , 그야말로 안타까운 죽음 그 자체 였다.

교통법규 를 지킨게 하나도 없었다.


그후 두 조카들 은 모두 장성 하여

둘째는 미국에서 목회 를 하고있고

셋째는 공군전투기 조종사 를 하더니

지금은 전역하여  대한항공 기장 으로 근무 하고있다.


그렇게 부산지부 에서 의 근무 가 어느듯 3년 이란 세월 이 흐르고  나니...

곧 인사이동 철 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제1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