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의 승선생활로 인하여 즐기지못한 휴가를 실로 오랜만에 따뜻한 봄날에 하루하루를 재미나게 만끽 하며 지냈다.
바다에서 느끼지못한 봄기운의 따스함이 실로 피부에 와 닿을땐 이런게 계절변화 에 대한 살아있는 행복 이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들도 만나고, 교회도 열심히 예배에 참석을 하였다.
배국환 형이 지휘하는 성가대에서 나는 테너를 맡았다.
예배후 성가대원들이 함께 먹었던 칼국수점심 은 지금도 그맛이 그리워진다.
그때 함께했던 대원들이 문득 생각이 난다.
현재의 집사람도 그시절에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람인연 이라는게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묘한거 같다.
같은성가대원 이었는데, 성가연습끝나고 집에갈땐 방향이 같아서 같은 시내버스를 타야만 했던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별 말없이 서로 서먹서먹 하여 한사람은 앞문으로 타고 ,한사람은 뒷문으로 타던 분위기가 , 차츰 차츰 한번두번 매번 같이 타고 가다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둘이 대화를 하며 가는사이 가 되었다.
혈기왕성한 젊은 청춘남녀가 자주만나게 되면 심장이 콩닥거리고 말못할
이상한 감정이 싹트게 마련인 법이다.
소위 이성간에 ‘사랑’ 이라는 감정이다.
< 제주도 서귀포 천지연 폭포에서..>
나도몰래 매주 교회 가는게 기다려졌다.
‘제사 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 에 더 관심이 있다’ 는 속담이있다.
이렇게 매주 만나게 되다보니 어느듯 성가대연습 에는 관심이 없고
성가대연습 이 끝나고 둘만의 시간 이 더 기다려졌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안보면 보고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어디로 가서 데이트를 할까?...
무슨예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그시절 대전근교 엔 청춘남녀가 데이트를 하려면 별로 마땅한곳 이 없었다.
기껏해야 만수원 이나 보문산 아니면 동학사 또는 극장,음악다방 같은곳 을 전전하며 데이트를 하였다.
그리고 그때는 핸드폰 이나 집에 전화가 없던시절 이라 헤어질땐 다음약속을 하며 헤어지곤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러갔다.
마냥 놀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에겐 특례보충역 이라는 옵션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하선후 5개월 이내에 재승선을 하지 않으면 군대에 가야하는 것이문제 였다
하루는 이버지께서 어느 친척분의 혼사 잔치집 에 다녀오시더니 쪽지에 뭘 적어오셨다
읽어보니, 그 친척분의 사위 되시는분이 ‘한국선급’ 선박검사원 이니 한번 찾아가보라는 연락처 였다.
승선해야할 시간은 다가오고...
마땅히 승선할회사는 정해진게 없고..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되던 시기였다.
다음날 바로 부산주소 로 당시 서대신동 에 사시던 생면부지의 머언 사돈에 팔촌쯤 되는 그 분에게 안면몰수 하고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승선할 선박회사를 하나 소개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나더니, 집에가서 기다려 보라고 말씀하시는거였다.
당시에 비 해양대출신 은 상선 타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부산중앙동에는 다방마다 브로커들이 진을 치고앉아 선원들에게 한달치 이상의 돈을 받고 그것도 B급회사 를 소개시켜주던 시절이었다.
난 그때 한국해양대학을 나오지 못한게 후회스럽기도하였다.
당시 해대출신은 일본 SANKO LINE 같은 데서 모셔 갈정도였는데
학연.지연.인연의 중요성을 그때 처음 느끼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소위 빽없고 돈없으면 서럽던 시절이었다.
집에가서 몇일을 기다리니 한 선박회사에서 반가운 연락이 왔다.
부산사무소 사무실이 중앙동에 있던 ‘보운상사’ 라는 Chemical tanker 선을 주로 운용하는 선박회사였다.
그 지긋지긋한 원양어선에서 이제야 그토록 바라고 고대하던 상선을 타고 오대양육대주를 항해할 생각을 하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입사서류를 접수하고 ‘보운21호’ 2기사 로 승선을 하게되었다.
< 보운21호>
선명:보운21호
총톤수:963톤
주기관:디젤1200마력
항행구역:근해
선종:LPG 탱커
당시 보운21호 는 대한석유공사 에 챠터 되어 울산-인천 간 LPG수송을
담당하고 있었다.
울산 장생포항 대한석유공사 터미널에서 LPG를 선적한후 인천 월미도 터미널에 하역해주고 공선 으로 다시 울산 으로 내려오는 코스 였다.
집사람과는 사랑의 싹을 틔우고 인생의 반려자로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하고
부부의 연을 맺고 이렇게 하여 인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 하게 되었다.
그래도 1주일이면 집에 올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 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인천에서 하역후 폭풍주의보 라도 내리게 되면 집에서 주의보 해재 될 때까지 몇일은 쉴수가 있었다.
틈틈이 쉬지않고 공부를 하여 해기사면허도 3급에서 2급으로 합격을 하였다.
집사람도 배에 함께와서 구경을 시켜 주기도 하였다.
달콤한 신혼생활과 함께 1년이란 세월이 빠르게도 지나갔다.
얼마가 지나자 회사에서 ‘보운1호’ 3기사 로 승선하라는 전선발령 이 났다.
집사람을 청양 처갓집으로 이사시켜놓고 보운1호를 인수하기위하여
1981년11월8일 김포공항 에서 난생처음 비행기에 몸을싣고 싱가폴로 향하였다.
싱가폴에서 교대하기위하여 조선소에서 수리중인 보운1호에 올라가보니..
어휴 이건 쓰레기를 싣고다니는 배인지..뭔지... 기관실 통로 는 온통 기름걸레로 쌓여있고 기름은 여기저기서 줄줄 새고있었다.
한숨이 푹푹 절로 나왔다.
회사에서는 선령이 5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배는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을거라고 예기했는데, 실제 와서 보니 이건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중국선원들이 타고있었는데..정말 떼놈들 지저분 하다고 말은 들었는데 설마 이정도인줄은 미쳐 몰랐었다.
날씨는 덥지...거주구역 에어컨 은 나오는둥 마는둥 시원챦게 돌아가지...
기관실은 쓰레기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지... 더하여 수리하느라 여기저기 모두 분해하여 부속들로 사방으로 널브러져있지..
기관실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피곤한 나날들 이었다.
그래도 3기사 담당 기기들을 하나하나 체크해나가며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 보운1호>
< 보운1호 에서 항해중 선내훈련 을 마치고...>
선명:보운1호
총톤수:9762톤
주기관:디젤8000마력
항행구역:원양
선종:케미칼 탱커
선령:5년
매일매일 전쟁아닌전쟁을 치르며 시간이 흐르다보니 쓰레기더미도 조선소 쓰레기야적장으로 모두 옮겼고 어느듯 수리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본사에서 부장 이라는 사람이 오더니 선원들을 모두 데리고 시내로 나가더니 저녁을 사주었다.
각자의 소개시간이 있었고..
보운1호 는 회사의 주력선 이며 앞으로 잘좀 부탁한다는 부장의 인사말도 있었다.
싱가폴 도착후 처음 시내구경을 하는 시간 이였다.
지금도 그 이름이 기억에 남는다.
‘People's Park’ 라는 쇼핑센타 1층 였는데 삶은꼬막 안주 에 시원한 맥주한잔 의맛은 일품 이었다.
돌아오는길에 전화국에 들러 집에 국제전화 를 하여 집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몇일이 지난후...,
내일 조선소에서 하가후 시운전을 마치고 이상이 없으면 바로 출항이란다.
그래서 오늘 은 모두 상륙을 하여 쇼핑 겸 시내구경 을 나갔다.
‘주롱 새공원’... 그리고
호랑이기름을 만들어 팔아서 부를 쌓은 사람이 만든 ‘화파빌라’...
너무나도 깨끗한 도시의 거리...
여러민족이 살지만 잘 어우러져 융합하며 사는 도시국가 ‘싱가폴’...
이광요 수상의 의지가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싱가폴 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 의 통치 스타일과 비슷한 정치가 였는가본데..
일종의 선의적인 독재 는 필요하다고 본다.
왜?.. 무엇이든 공산당 빼고는 100% 찬성은 없는법 이니까.
청렴결백한 정치가 만이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 갈수가 있는 것이다.
실례로..
그시대에 우리보다 잘살었던 필리핀 이나 아프리카의 케냐,이디오피아, 같은 나라가 그동안 국가지도자를 잘못만나서 지금 은 최 빈곤국가 가 되어있는걸 보면 국가지도자의 중요함이 얼마나 큰지 알수가있다.
정경유착 이나 하여 사리사욕 이나 채우며 부정축재 나 하고,...
감방이나 갔다오고,....
먹은돈 토해내고....
후환이 두려우니,... 에라모르겠다! 죽고보자!
이무슨 국가적 창피고 망신인가!...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어 무슨 국가가 잘되기를 바라겠는가?...
김정일이한테 면담한번 하려고 수백억씩 현찰로 퍼주고..
정일이는 그돈으로 핵무기 개발하여 우리를 겨냥하고....
그런돈 있으면 서울뒷골목 쪽방에 사시는 할아버지.할머니들 에게 용돈이나 넉넉히 좀 나눠드리지....
죽을 때 한푼도 못가져 가면서 우리 정치가 들은 지금 욕심이 잉태를 하고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있으며
오늘한말 이 내일이면 바뀌고 있다!
도대체 신뢰를 못하겠으니...우리나라 의 정치장래 가 심히 걱정이 된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정치 안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철석같이 약속해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안오던지.....
다시 정치하겠다고 번복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도 있지 아니한가?
모두가 너나 할거없이 정치쟁이 는 거짓말쟁이 인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까지 왔나 모르겠다.
각설하고...
우리는 시운전을 무사히 마치고 앙카리지에서 연료 와 부식 및 선용품 수급을 완료하고 싱가폴을 뒤로 하고 출항을 하였다.
<보일러사고>
보운1호는 케미칼 탱커 이기 때문에 주기관 못지않게 보일러 의 역할 도
굉장히 중요하다.
싣고다니는 화물이 주로 화학제품 아니면 팜유 또는 원당 등 기타 액체상태의 제품을 싣고 다닌다.
겨울철에는 항상 따뜻하게 화물을 히팅을 하여야 하며, 하역작업 을 할때도 잘 펌핑이 될수 있도록 적정온도까지 올려주고 잘 유지해 주어야 한다.
만약 보일러가 고장 이라도 나면 화물은 응고를 하여 펌핑을 할 수가 없어서 하역작업을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케미칼탱커 의 보일러는 100% 완벽하게 고장없이 작동될수 있도록 담당 엔지니어는 항상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다.
기관부 는 당직사관이 1기사.2기사.3기사. 가있는데
모두 각자 담당 하는 기기가 다르다.
참고로 당시 보운1호 기관사 의 담당기기 및 업무분야를 간략히 살펴보면...
1기사 : Main engine. E/R Day work control
2기사 : Boiler, Cargo pump & engine. Bunkering.
3기사 : Air con, Electric generator engine.
이렇게 구부되어져있다.
공선으로 첫 Loading을 위하여 필리핀 쟘보앙가 로 항해를 하였다.
가는도중 갑판부 는 탱크 크리닝을 하느라 연일 바쁘게 움직이고
기관부도 부속창고 정리정돈 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지나갔다.
창고정리 하면서도 계속 중국놈들 참 기가막히다고 욕을 안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창고정리 뿐만아니라 부속정리도 제대로 되어있지않아서 어느부속이 어느박스에 담겨있는지 섞여있어서 처음부터 박스를 쏟아놓고 새로 정리를 하였다.
그때생각하면 당직때마다 박스 쏟아놓고 부속 선별하느라 애를 먹었던 생각이 난다.
아마 한달은 걸리지 않았나 싶다.
신조선 이든 중고선 이든 인수멤버는 항상 고생을 각오 해야한다.
쟘보앙가에 입항하여 팜유를 싣고 출항을 하였다.
출항후 3일째 되던날 드디어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
보일러 압력이 급격히 다운되고 수위가 급격히 낮아졌다.
보일러 소화 후 어느정도 열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보일러 내부점검을 하여 보니 보일러튜브 3분의1 정도가 열변형이 되어 이음매부분에서 물이새고 있었다.
이런상태로 는 보일러 는 운전이 불가능한 것이다.
교대로 얼굴에 찬물수건을 두루고 2명이 한조가 되어 5분씩 교대로 들어가서 튜브 익스팬더를 치고 나왔다.
나중에 원인분석을 하여보니 2기사가 보일러경험 이없어서,
보일러는 점화시에 서서히 점화를 해야지 갑자기 물주전자 끓이듯이 버너를 쎄게 100% 부하를 걸어 불을 붙이면 보일러 는 열변형이온다.
이를 간과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무리하게 부하를 걸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2항사 실족 사망사건>
임시로 수리 완료후 보운1호 는 싱가폴앞 을 지나 말라가해협을 지나고있었다.
해적도 가끔 씩 나타난다는 좁은 수로 에서 수많은 배들이 질서정연 하게 항해 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전에 내가 탔었던 참치잡이 원양어선 들도 보였다.
만선하여 귀국항해를 하는 배도 보였고,
이제 만선의 꿈을 안고 어장으로 출어 하는배 도 보였다.
여기서 이런 마구로배를 보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졸업후 처음으로 승선 했었던 해창18호 생각이 났다.
그후로 괴기는 잘잡았는지...ㅎㅎ
보운1호 는 순항을 거듭하여 인도양을 지나 수에즈운하로 접어 들었다.
도선사가 승선하고...
운하 양 옆으로 는 모래사막이 끝없이 펼쳐졌다.
사막 한가운데로 수로를 내고 배가 지나 간다는게 참으로 신기 하기도 했다.
중간 중간 에 정박 할때는 이집트 의 잡상인들이 막 올라와서 여러가지 기념품 같은 것을 팔기도했다.
그중에 발견한 한국산 손톱깍이 도 있었다.
그 손톱깎이를 보면서 왜 그리도 가슴이 뿌듯 하던지...
수에즈운하를 무사히 통과하고 운하의 마지막항구 인 Portside 항을 벗어나 지중해 로 접어들었다.
겨울철 지중해 는 생각보다는 파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날씨가 계속 좋지않아 배가 계속 요동을 치며 항해를 해야했다.
아프리카 모로코 와 유럽 의 스페인 이 서로 마주보고있는곳 지브랄타 해협을 통과하고, 보운1호 는 북으로 변침을 하여 네덜란드 로트르담항구를 향하여 항해를 계속 하였다.
북으로 갈수록 점점 더 기온이 떨어지고 영하의 날씨가 계속 되었다.
로틀담 에 도착하여 무사히 팜유를 양하 해주고
내일이면 다시 다음항차를 위하여 출항 할 예정이 잡혀 있었다.
겨울철 북유럽 의 날씨는 늘 우중충하고 낮에도 햇볕을 거의 볼수 없으며
늘 음산한 영하날씨의 연속 이다.
길거리는 눈이 항상 쌓여있고 바닥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여 늘 질퍽거리며 살짝 얼기라도 하면 늘 조심해야한다.
그날도 선원들은 과업을 마치고 저녁에 상륙하여 술한잔씩을 하였던 모양이다.
술한잔씩을 걸치고 본선으로 귀선 하던중 갱웨이 사다리를 올라오던중에
2항사가 얼어버린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그만 바다로 추락하고 말았다.
한번 물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다리 밑에 그물망 만 쳐놨어도 바다로 직접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배에서 이런 사고가 종종 일어나다보니
지금은 사다리 밑에 그물망 치는 것을 국제적으로 강제규정을 하고 있는모양이다.
그땐 무슨 안전 이니 뭐니 이런건 뒷전 이었을때다.
지금은 무슨 안전교육이다,케미컬탱커교육이다,유조선교육이다.LPG교육이다
뭐 따로따로 다 필요한교육 을 이수해야만 승선 이 가능하지만..
그시절엔 그런 전문교육이 따로 없었다.
얼마있으니...
우리 한국에도 선원들 교육을 담당하는 ‘해기연수원’ 이 생기었고
그때부터 모든 선원들 은 정기적으로 교육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전에는 그져 회사에서 이력서 보고 채용만 해주면 어느선종 의 선박이든 발령 이 나는데로 승선이 가능 하던 시절 이었다.
-제7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