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57년 6월 27일.....
6.25전쟁 끝이나고, 전쟁의 폐허더미에서 겨우 헤치고 나오던 한국의 부산항 제1부두.해양경찰대학 강당에서 는 커다란 행사가 있었다.
'지남호' 라는 배가 '참치' 라는 보도 듣도 못한 큰 고기를 잡으러 먼 미지의 남태평양 으로 출항하는 환송식 이었다.
남태평양 출어는 건국이래 처음인 쾌거였다.
당시 김 일환 상공부 장관,
홍 진기 해무청장,
이 한창 수산중앙회장 ,
안상한 중앙 수산 시험장장,
그리고 김 진만 국회상공 위원장
등이 웅대한 출어에 나서는'지남호'의 장도를 비는 축사를 했다.
신문은 최초 원양어선의 출항을 크게 보도했다.
당시 국민은 나락에 굴러 떨어진 참담한 절망주의가 퍼져있던 시기였다.
빈곤하고 힘든 모국보다 뭔가 행복이 있는 외국을 동경하는 현실도피 주의가 팽배해 있을 때였다.
이런 낙망의 시기에 먼 남양으로 떠나는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은 국민들에게 어떤 희망감을 느끼게 하는 자극을 주었다.
어느 책에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이 화물선을 개조한 것이라고 소개 했던데 잘못 된 것이다.
지남호는 1946년 미 정부가 종합 시험 조업선으로 미국 오레곤주 아스토리아 항의 한 조선소에 발주해서 건조한 선박이다.
이 배는 600마력의 엔진에 230톤의 크기였다.
시험 조업선이었기 때문에 트롤이나 연승, 선망등이 모두 가능한 다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시설도 최신식으로 냉동, 냉장 ,무선 방향 탐지기, 측심기, 그리고 어군 탐지기등의 전자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에서 운행할 당시 선명은 ‘SS Washington’ 호 이었다.
이 배는 그후 1949년3월에 미국 ECA 원조자금으로 한국 정부에서 구매 를 하였다.
'지남호' 라는 쟉명은 인수당시 이 승만 대통령이 한 것이다.
남쪽을 지향해서 부[富]를 건져오라 이름으로 한문 지식이 뛰어난 이 승만 박사의 문취[文趣]가 느껴진다.
배는 원조 자금으로 구해왔으나 이를 운영할 노우 하우도, 자금도, 판로도, 없는 백지상태 였었다.
어선으로 태어난 이 배는 한국에 와서도 할일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화물선 노릇이나 순시선 역할을 했다.
다르게 말하면... 자전거를 구경도 못한 어린 아이에게 덜컥 자전거부터 사준 격이었다.
비극의 한국 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이때 참치 산업의 꿈을 품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사람은 제동산업의 창업자 심 상준씨였다.
심 사장은 이미 미국에서 들어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던 지남호를 눈여겨 보고있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그 지남호 를 불하받은후, 처음에는 연근해 조업도 해보고, 냉동 수산물 대일 수출 사업도 해보았으나 신통치 않았다.
그는 활로를 찾아 생각해두었던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에 정부가 적극 돕고 나섰다.
해외 출어라는 밑그림을 그린 심 상준 사장은 출어하기도 전에 정부의 도움을 받아 잡은 참치를 사줄 미국 회사와의 거래부터 들어갔다.
에이젠트 는 당시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났고, 하바드 대학을 졸업한 'Mr.윔스' 씨가 수고를 했다.
그들이 접촉한 것은 미국의 거대 참치 캔 회사 밴 캠프 사였다.
처음에는 그들은 참치 잡이에 관한 아무 것도 없는 처지에 참치부터 사달라고 조르는 한국을 무시해버리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남태평양 해역에 이미 참치 잡이 어선들이 200여 척이나 조업하는 일본이 눈치를 채고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 방해는 지남호가 일본 수산업의텃밭이었던 사모아 근해로 출어 했을 때 극에 달했었다.]
그러나 '윔스'는 안정적인 원료 확보를 위해서 구매선의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설득하자 구매담당 부사장 앨링턴 씨가 이해를 해서 검토에 들어갔다.
밴 켐프 회사내에서 갑론을박을 한 끝에 최고 경영진은 잡아올 배도 없이 참치부터 사라는 한국의 제의를 한번 지켜보자는 반 긍정적인 결정을 했다.
참치를 잡아 오면 거절하지 않고 사주겠다는 것이었다.
별 것도 아닌 대답을 얻기 위해서 정부와 심 상준 사장의 힘든 노력을 해야 했다.
그만큼 한국의 능력에 대한 미국 산업계의 불신감은 아주 컸다.
현대 그룹의 정 주영회장이 조선소 도없이,조선소 지을 땅의 지도와 거북선의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동전을 가지고 선박을 수주했던
맨손 마케팅 보다, 그 훨씬 전에 맨손마케팅 을 한 셈이다.
하여튼 거래선을 확보한 심 상준 사장은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지남호의 정비와 출어 준비를 시작했다.
츨어 자금 마련과 여러 중요한 일에 정부의 지원이 컸다.
그만큼 정부도 해외 진출의 첫사업에 기대가 컸었다.
[사실 첫 출어는 제동 산업과 정부의 공동 사업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당면한것은 지남호를 운행할 인적 자원 확보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대형 어선의 조업 경력이 있는 윤 정구 씨[1948년 부산 수산대 어로학과 졸업.훗날 고려원양 상무 와 오양수산 사장을 역임 ]
가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선원들은 참치 연승어업과 비슷한 상어잡이 어선 출신 중심으로 구성했다.
당시 한국에서 참치를 잡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역사적인 해외 어로에 나서는 이 어선에 선장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총괄 지휘할 '단장'이라는 직책이 있었고 [이 '단장'은 해무청 어로과장인 남 상규씨가 맡았음],
그리고 '어업 지도관'이라는 직책도 있었다. [이 직책은,중앙 수산 시험장 어로과장 이 제호 씨가 이 직책을 맡았음]
이 분도 참치 어업을 해본 경험은 전혀 없었기는 마찬가지였다.
외국 책에서 얻는 정보를 현장에서 응용하는 수준의 자문을 했다.
[수산관계 고위 공무원들이 힘든 원양 출어에 동행한 것을 보면 정부가 이 신사업을 범정부적으로 후원하고 있슴을 알 수가 있다. ]
이 정도의 준비를 하고서도 정부와 제동 산업은 불안하기만 하였다.
할수없이 고민끝에 미국에서 참치잡이 어선의 선장을 했던 모르간[Morgan]이라는 사람을 기술고문으로 데려와 승선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지남호는 1957년 6월 27일, 국민들의 성원아래 푸른 꿈을 안고 부산항을 떠났다.
계획은 2개월 정도의 조업에 223톤의 참치를 어획하고 15만 달러를 수출한다는 야심 찬 것이었다.
[당시 이 한국 최초의 참치잡이 출어에 부산 수산 대학교 어로과 졸업생 한명이 '3등 항해사'로 합류했었는데,
그는 훗날 '동원그룹'의 회장인 '김 재철' 씨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거친 선원들을 다부지게 통솔했었다고 같이 출어했던 사람이 회고했었다.
김 항해사는3년 뒤 1960년 27세의 나이에 102톤 크기의 '지남2호' 선장이 되었다.]
'지남호'는 다음날 일본 시모노세키 항에 들러
7월 10일까지 선박의 정비와 선용품, 식량등을 확보하고
7월 11일 시모노세키항 을 출행했다. 그리고 항해 를 거듭하여
7월 17일 대만 남단의 카오슝 항에 기항하였다.
이곳은 향후 조업의 기지로 잠정 결정했던 곳이다.
7월18일 다시 출항한 지남호는 대만 근해 에서 시험 투승(投繩)을 하였다.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인 연습 투승이었다.
참치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미국인 모간의 지도로 참치 투승을 어떻게 한다는 방법은 손에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일이 생겼다.
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선원들을 지도하던 모건이 허리의 통증이 재발해서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서 그를 입원시켰다.
며칠이 지나도 그의 차도에 변화가 없었다.
할 수없이 그를 대만에 남겨두고 지남호는 홀로 다시 바다로 나와야만 하였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수만은 없었다.
지남호는 싱가폴 근해에서 진짜 투승을 했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더구나 연료마저 떨어져 싱가폴 항에 들어가 연료와 식량, 그리고 선용품을 다시 보충하고 8월 11일 출항했다.
참치 잡이의 아마추어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와 토론을 거듭한 끝에 인도양 니코발 아이랜드 해역으로 결정하였다.
3일후인 8월 14일 지남호는 니코발 부근 조업 예정 어장에 도착했다.
부산을 출항해서 이곳저곳에 기항하느라 경비만 까먹으며 두 달 간의 세월을 허비한 지남호의 사람들은 상하 할 것 없이 초조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해역에서는 어쨌든 수확을 올려야한다는 긴박한 기대감도 있었다.
해역 도착 다음날 8월 15일 드디어 한국 원양어업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투승이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인 날의 기후는 쾌청했고 바다는 잔잔했다.
투승 지점은 북위 07도 48분, 동경 94도 29분이었다.
선원들은 서투른 솜씨로 낚시들을 바다에 깔기 시작했다.
40여 킬로에 달하는 투승이 완료되고 너덧 시간 후 다시 양승이 있었다.
몇 킬로나 깔아놓은 낚시에는 아무것도 걸려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중간쯤이 되자 “어?!"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올려지는 낚시에 무거운 감촉이 있었던 것이다.
그 무거운 물체는 드디어 물위에 정체를 내밀었다. “와!”하는 함성이 갑판위에 울려 퍼졌다.
새치였다.
뒤에 원양어업 대국이 된 한국의 첫 원양어선의 첫 수확물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코 창이 뾰족하게 달린] 새치였던 것이다.
영어로는 'marlin'이라고 하고 일본어로는 '메까'라고 부르는 생선이다.
연이어 연승에 드문드문 참치들이 걸려 올라왔다.
그날 첫 어획에서 잡은 어획물은 0.5톤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어획을 올렸으면 후대의 참치 선장들은 한숨을 쉬면서 걱정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지남호에서는 자축 파티가 있었다.
어획량이야 어땠건 할 수있다는 가능성은 보았던 것이다.
용기백배해진 지남호는 계속 조업을 계속했다.
이 2 주간 매일 0.5톤 -1.0톤의 빈약한 어획이었으나 지남호 해상 근무자들은 경험 축적이라는 귀중한 재산은 착실히 모으고 있었다.
윤 정구 선장은 두 달을 허송세월한 만큼 본전이라도 건져 회사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조업을 독려했다.
그러나 조업은 단 2주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배에서 음용(飮用)할 식수가 다 떨어졌던 것이었다.
싱가폴로 돌아가야만 했다.
지금 같으면 조수기[造水機]가 있어서 바닷물을 민물로 만들어 식수와 목욕물로 쓸테지만 당시에는 그런시설이없었다.
그리고 지남호는 뱃머리를 돌려 귀국 길에 올랐다.
다시 싱가폴에서 식수와 연료를 보충하고 부산항으로 귀항하던 지남호는 10월 5일 대만의 기륭 항에 들렸다.
여기서 지남호의 뒤를 이어서 참치 잡이 시험조업에 나섰던 부산 수산대학교 시험 조업선 '흥양호'(선장:이인호)를 만났다.
'흥양호' 와 첫 실습항해 출항하는 부산수대 어로학과 학생들
'흥양호' 사모아 에 입항하여 환영행사
지남호는 10월 8일 기륭항을 출항하여 사흘 뒤 10월 11일 한국 부산항에 입항을 했다.
거국적인 환영을 받으며 출어를 한지 4개월만이었다.
첫 출어 때의 엄청난 목표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아무도 이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후 윤정구 선장은 2차 출어에서 100여 톤의 참치를 어획해와 기염을 토했다.
뒤이어, 흥양호 도 사흘 뒤인 10월 14일 부산항 에 닻을 내렸다.
흥양호는 1955년 일본 에서 신조한 채낚이 어선(목선.나포당시88톤)이었는데, (훗날 103톤 으로 개조 하였음.)
당시 리승만 조업라인 을 위배하여, 영해침범 죄 로 우리측 해양경찰 에 나포된 어선 이었다.
'흥양호' 의 조업 성과는 별것이 아니었지만, 이 배는 한국 원양어업계 의 인재들 을 육성함 에있어 실습선 으로써 큰 족적을 남겼다.
아무튼, 국민들의 큰 기대 속에 출어했던 지남호는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언론들은 계속 지남호 소식을 추적했었다.
그러나 지남호 기항 직후 일본의 방해를의식한 이 대통령의 지시로 한동안 보도관제를했었다.
이 승만 박사는 자기가 작명한 지남호의 국가적인 대사를 박찬일 비서관을 통해서 챙겨왔었다.
이 대통령은 지남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해무청의 지 철근 국장[후에 남북 수산 회장],과 배를 타고 출어했던 남 단장을 만나서 치하하고, 이어서 제동산업 심 상준 사장을 경무대로 불렀다.
부산에 있던 심 사장은 잡은 참치 아니 새치 중에 제일 큰 놈을 골라 가지고 급히 상경했다.
이 박사는 기분이 아주 좋아서 계속 미소를 지으며 심 상준 사장을 격려했다.
1.8 미터 크기의 참치를 연신 만져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오래 된 외국생활에서 참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 튜나 나에게 줄 수없나 ?
서울 외교관들에게 자랑하고 싶구먼.... 우리나라 사람이 잡았다고 하면서 말야.“
이틑날 프란체스카 여사는 새치를 여러 부위로 구분해서 주한 외교관들에게 선사했다.
이 대통령의 즐거운 기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며칠 뒤 국무회의에서우리 국민이 먼 남쪽 바다에 나가 참치를 잡아오는 장거를 이룩했다고 자랑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인도 국제무대에 나가 당당히 활약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주한 외교관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작이 반이었다.
제동산업의 심 상준 사장은 약속대로 잡은 참치 중 5톤을 항공편으로 미국에 보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대미 참치 수출의 시작이었다.
밴 캠프사의 본사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 비치를 방문한 심 상준 사장에게,
경영진은 아무 경험도 없는 한국 기업이 정말 참치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었다고 실토했다.
심사장은 이 조업 가능성을 바탕으로, 밴 캠프회사와 협상을 벌여 연간 9,000톤의 참치를 납품하는 대신,
참치 잡이 어선 11척을 도입할 좋은 조건의 금융 지원을 약속받는 쾌거 를 달성했다.
세계의 빈국이었던 폐허 한국이 경제 개발의 초기에 ,
한 기둥이 되었던 원양어업에 큼직한 첫 발길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당시 지남호 의 소식을 보도한 신문>
<이 대통령 께 진상된 청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