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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열 의 자서전(제5부)

김홍열 의 블로그 2014. 8. 9. 19:03

포항수전 입학식 날 우연챦게 반가운 한 얼굴을 만났다.

석교동에서 함께 이웃으로 살았던,대전상고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불엇던 이상욱 이를 포항에서 입학식날 만난거였다.

고등학교 졸업후 서로 소식을 몰랐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무척이나 반가웠다.

입학식을 마치고 솔밭 사이를 지나 송도해수욕장 으로 가서 바닷가에 가서 바닷물부터 진짜 짠맛인지 맛을 보았다.진짜 물맛이 짯다. 왜 바닷물은 짠걸까?????? ........

어릴 때 옜날이야기를 우리집 사랑방에서 머슴 아저씨가 들려준 예기가 생각이 났다..

옜날에 한 소금장수 아저씨가 있었는데, 소금나오는 멧돌을 배위에서 돌리다가 멧돌을 멈추게하는 말을 잊어먹어서 멧돌이 멈추지 않고 계속돌아가는 바람에 그 소금배가 침몰하여 지금까지 바다밑에서 그 멧돌이 돌아가고 있다는 옜날이야기가 생각이 났었다.

저멀리 영일만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대형 외항선을 보고, 나도 이제 이학교를 졸업하면 2년후 에는 저런배에서 3등 기관사로 일을 하며 세계일주를 하고 있겠지...흐흐흐...가슴 이 뿌듯하고,벅차고, 설레였다.

 

 

영일만 에서 마도로스 의 꿈을 키우며...

 

당시에 포항에는 포항종합제철 에 호주에서 철광석을 싣고 오는 대형 벌크선 들이 드나들었는데 빈배로 떠있을땐 배가 두-세척만 떠있어도 영일만 이 꽉찼다. 9 Cargo Hold 정도 되는 배였는데, 약 10만톤 은 되는 배들이었다.

입학후 나,이상욱, 또 상욱이 와 함께온 정운영 이란친구 이렇게 3명이서 당시 포항보건소 에 다니는 정수문 이라는 분 의 집에서 방한칸을 월세로 빌려서 자취를 하였다.

나와 정운영 이는 같은 기관과였고, 이상욱이는 경영과 야간 이었다.

입학을 하고보니 전국 8도강산 각지에서 다모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자동차 과를 나와서 기관학 전공을 공부 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가솔린엔진이나 디젤엔진이나 근본 원리는 4행정4싸이클 기관이기 때문에 학점은 잘 나왔다.

그때는 포항시내가 포항종합제철 직원들의 출퇴근하는 자전거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자가용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니 POSCO 직원들 은 거의가 노란색작업복 에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대신에 군용 워커를 신고, 안전복장 차림으로 왼쪽가슴에 명찰을 달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였다.

영일만 뻘밭에 세운 포항종합제철이 이제 는 세계적 철강회사로 자리메김을 한 것을 보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굳은 의지가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실감한다.

우리고향 산골마을 옥천땅 돌목에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기 가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 그에따라 농촌 생활패턴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대전 서 포항을 가려면 열차 와 버스 노선이 있었는데, 나는 주로 고속버스로 대구까지 내려가서, 대구 동부 터미널에서 시외버스 로 갈아타고 포항을 향했다.

나보다 한살 위고, 대전 우리집에서 계룡공고를 졸업하고, 당시 대구에서 취직이되어 군대가기전 혼자 직장생활하고 있었던 큰외삼촌이 있었다. 대전과포항 을 오고갈때 짬짬히 외삼촌에게 들려서 술한잔도 얻어먹고,용돈도 가끔씩 받아쓰곤 하였다.

또 고등학교때 외삼촌이 소개해줘서 그동안 펜팔로 사귀던 이영진 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외삼촌과 함께 셋이서 저녁도먹고,탁구도 치던 생각이 난다.

당시에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대구 동성로 음악감상실 에서 입담이 구수한 DJ 의 해설을 들으며 팝송에 졎어 보기도 하였다.

그여학생 은 마음씨가 착했던걸로 기억이 남는다.

지금생각하면 철없던 시절이고 ,순수햇던 시절이고,손목한번 제대로 잡아보지도 못했던 풋사랑 이라고 해야 맞을거 같다.

그렇게 나와사귀던 그여학생은 내가 포항수전을 졸업하고, 배를타고 외국으로 돌아다니다 어느날 귀국하여 외삼촌에게 물어보니 그여학생집에서 배타는사람 과는 사귀지 말란다고 하여 시집을 가버렸단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국을 출항할 때 뭘 사다줄까 물어보니, 각나라마다 유행하는 카셋테이프 노래를 하나씩 사가지고 오라고 해서 사왔는데, 그말을 듣는순간, 그카셋테이프 는 쓰레기더미에 던져졋고,그동안 주고받은 편지며,사진이며 몽땅 쓰레기통에 갔다 버려버렸다.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있을 뿐이다.

각설하고...

그럭저럭 입학기분내느라고 지내다보니1년이 후딱 지나가고 , 어느듯 2학년 신학기가 되었다. 2학년이 되고나니 이제 1학년때 어영부영 보내던 시간이 아까워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그이유 는 졸업하기전에 그토록 학수 고대하던 ‘갑종2등기관사’ 해기사 면허 시험 에 꼭 합격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이면허를 패스 못하면 여기온 보람이 없어지고, 내인생의 진로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무슨일이 있어도 해기사면허 는 따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따라서 그동안 하던 자취생활을 청산하고 하숙생활로 바꾸어 생활을 하였다.

자취생활때는 내의지와 상관없이 단체로 뭉쳐다니고, 싫어도 함께 가야하는, 소위 의리 때문에... 객지에서 부모님곁을 떠나, 제제하고, 잔소리 하는 사람도 없으니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자유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송창식의 고래사냥 처럼....이장희 의 그건너 노래처럼... 우리 패거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시간을 허비하며 지냈다.

이젠 그것도 돌아갈수 없는 젊은시절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금생각하면 그땐 그게 우리 젊은세대 의 한 문화였는지도 모르겠다.

2학년때는 승선실습기간이 있는데 나는 국립수산진흥원 의 지리산호 에 실기사 로 승선하여 실습을 마쳤다.

또한 우리학교 실습선 동백호 에 어로과 하고 기관과 가 함께 실습을 위하여 동해안으로 출항을 가기도 하였다.

그때 어로과 누군가가 갑판에서 기관실로 오줌을 싸고 도망가버렸는데, 우리는 기관실에서 망치며 , 각종 공구 들을 들고 갑판으로 나가서 누가 오줌쌌냐고 항의하며 일촉즉발의 단체 패싸움 까지 갈뻔한 일도 있었다.

당시 어로과와기관과는 서로 사이가 안좋았다. 어로과는 어선선장만되면 돈을 무좌게 벌수있다고 떠들어대고, 우리 기관과는 대형상선 기관장이 되면 편하게 세계일주하며 돈을 번다고 떠들어대고.. 하여튼 서로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드디어 2학년 2학기 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갑종2등기관사 면허시험이 몇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의 모든 실력을 총동원하여 갈고닦으며 최종적으로 요점만정리하여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였다. 시험은 부산 해양고등학교 에서 치러졌다. 시험문제지를 받는순간 대충훌터보니 별로 어려운게 없어보였다.

우선 확실하게 아는문제만 풀고 점수계산을 해보니 합격점이 훌쩍넘었다. 안심이었다.

내주위에 다른 친구 들에게 컨닝도 시켜줬다.

학교다닐 때 강의도 맨날 빠지고 공부도 별로 안했던 한친구도 나 때문에 합격을 하였다.

그리고 는 이제 얼마남지 않은 졸업때까지 각자 해운회사에 취업을 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학교에서는 면허시험까지만 합격시켜주면 취업을 각자 알아서 해야했다.

당시 외항선 탄다는게 설령 해기사면허를 딴다해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것을 졸업후에야 알았다.

부산 중앙동 다방에는 1달치 내지는 2달치 돈을 받고 외항선에 승선시켜주는 브로커들이 아예 상주하고있었다. 브로커 잘못만나면 돈만날리고 승선도 못하고 피해사례도 많았다. 한친구는 친척이 해운회사를 하고있는친구가 있었는데 ,

그친구는 졸업후 바로 승선을 하였다.

부러웠다.

외항선 회사에 이력서를 넣어도 소식이 오는데가 한군데도 없었다. 내가생각했던건 이런게 아니었는데...실제상황은 현실이 기대와 너무나 달랐다.

졸업후 얼마까지 승선을 못하면 군대 에 가야했다. 당시 특례보충역 이라하여 국가기간산업체 라든지 외항선 또는 원양어선에 5년간 승선하면 군입대가 면제 되는 제도가 있었다.

시간이 말없이 흘러갔다.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다.결정을 속히 해야 할때가 되었다.

 당시 국영회사 였던 준설공사 에서는 이력서만 넣으면 얼마든지 받아준다고 하였는데 우리동기들은 거기간 친구는 한명도 없었다.

나도 물론 외항선 타고 외국구경할 수 있는 것에 매료되어 준설공사 는 별 생각이 없었다.

할수없이 고민을 하다가 선택의 여지도 없고하여 원양어선 쪽으로 결정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배가 선장을 하고있다는 해창수산 에 이력서를 넣으니 바로 취업이 결정 되었다.

부산중앙동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무슨 재비뽑기를 하란다. 선원수첩을 항만청에서 승선 공인을 받을 때 무슨직책으로 공인 을 받을것인지를 결정하는거였다.

내용인즉..이번에 기관사로 승선하는 2명중에 1명은 기관장으로, 1명은 1기사로 승선공인을 받고, 막상 기관장이라는 사람은 해기사 면허가 없기 때문에 기관부원 으로 선원수첩공인을 받아야 하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1기사로 선원수첩에 공인하기로하고, 회사를 나와서 충무동에 정박하고있는 ‘해창18호’ 에 승선을 하였다. 그땐 똥배 인지 새배인지 구분도 안갔고, 더구나 찬밥 식은밥 가릴여지도 없었으며, 단순히 취업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져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일명 ‘마구로 독항선’ 이라하여 참치연승을 하는 원양어선 인데 한항차마다 만선을 하면 부산으로 돌아와서 일본으로 하역하러 갔다와서, 영도에있는 조선소에서 상가수리 후 다시 다음항차를 위해 출항을 하는 그런 코스였다.

한항차가 거의6개월정도 된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수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인데 대게 3가지로 분류할수가있다.

 

첫째는 당시에 고려원양 에 ‘유신호’ 라는 명태잡이 공모선이 있었고, 소위 ‘북양트롤’ 명태잡이 선단 이있었다,

둘째는 거의 6개월마다 만선하면 부산으로 귀국하는 ‘참치독항선’ 이있었고,

세 번째로는 기지선 이라고 하여, 만선하면 한국으로 오는게 아니고 현지 항구에 입항하여 하역작업을 하는게 있었는데, 이런배에 타는 선원은 보통 2년 내지는 3년 있다가 귀국을 할 수가있었다.

당시 북양트롤은 돈이된다하여 소위 빽없이는 아무나 탈수없엇고..

기지선은 2,3년씩이나 있다 귀국한다는게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고..

내게는 한항차가 6개월정도 걸리는 독항선이 딱 마음에 들었다.

해창18호 에 승선을 하여보니, 선원들이 지난항차 갔다온 남태평양 사모아부근 에서 작업했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데 실로 흥미로왔다.

외국에대한 동경 때문인지 그들이 이야기 하는 부분 이 무척이나 솔깃하게 들렸다. 어서 수리를 마치고 출항을 하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모든게 신기하고 궁굼할 따름 이었다.

이제 참치잡는배에 왔으니 참치는 어떻게 잡는건지....

충무동 남항 에는 당시에 원양어선들이 모두 한곳에 집합하여 계류하고있었는데, 서로간에 정보도 교환하고 그들의 경험담을 듣는게 참 재미있었다.

머리에 사과를 이고 위험하게 배마다 건너다니면서 사과를 파는 아줌마도 있었고...

드디어 수리를 마치고 모레쯤 출항한다고,

이틀전에 출항시꼬미를 하라며 전도금 이라고 하여 목돈이 조금 나왔다.

나는 이돈을 받자마자 부산역으로 달려갔다.

대전행 열차에 몸을 싣고 대전집 으로 직행했다.

그동안 집에 없던 14인치 흑백TV한대 하고 제법큰 냉장고한대를 즉시 사다놓고 , 부모님께 인사 를 올리고 ,야간열차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오면서 부모님 과 가족들이 지금TV를 보면서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마음 이 뿌듯했다.

그때 사다 놓았던 TV

당시 동네 에 텔레비전이 없다보니 뭘좀 보려면 , 집앞 석교국민학교 숙직실 로 모여들었다. 저녁이면 아예 테리비를 숙직실 마루 밖에다 테리비를 내다놓아서 주민들이 볼수있도록 선생님들 께서는 동네 주민들에게 배려를 해주었다.

그동안 이 자그마한 흑백 TV는 우리가족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갖게하는 임무를 다하고 , 칼라TV 에 밀려 고향 시골집 에 보관하고있던 것을 지금은 내가 가져와서 보관하고 있다.

이제 모레면 대망의 출항뱃고동을 울리며 드디어 부산항을 출항 할것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설레엿다. 

 

 

                                    < 선원수첩 에 ,심지뽑기 한 , 1기사 로 공인 되어있다>

 

                             <대형참치 를 갑판 위로 잡아올린 모습>

-제5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