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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열 의 자서전(제4부)

김홍열 의 블로그 2013. 7. 4. 08:57

집앞 도로건너 에 묘지하나가 있었고

그옆 공터에 어느날인가 대형군용천막이 쳐지더니

매일밤 사람들이 모여 큰소리로 울고불고  눈물콧물을 흘리고 외치며

큰북까지 쿵쿵 두드리며 요란스럽게 난리가났다.

이런모습을 난생처음보는 나로써는

도대체 이게 뭐하는집단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않았다.

나는 이런 광기어린 집단의 울부짖는모습을 난생 처음보았는데

참으로 신기하기 이를데가없었다.

나는 하도 신기하여 매일밤 저녁만먹으면 어슬렁 어슬렁 구경하러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는 감히 이곳천막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천막안을 기웃거리다가 끝날무렵이면 집으로 슬그머니 돌아오곤하였다.

그러던중 어느날 누군가가 한번들어오라고 하여 이모임에 참석을 하게되었다 ,

이곳이 교회 라는것과 또 부흥회를 하는것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그날로부터 일요일 이면 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을 하게 되었고

개척교회 로써 이제 새로 시작을 하는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번참석하고 두번참석을 하다보니 매주 일요일이기다려졌다.

그때 함께 이렇게 천막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던 형제 자매들 이 문득 그리워진다.

 

천막개척교회 의 모습. 

할아버지 앞에 앉아있는 손현수 성도님 은 가수 가 꿈 이었었다.

대전KBS 대회 에 나가서 송대관 의 '이별' 을 부를땐 가서 박수 도 쳐주었다.

 

 

 

 안골저수지 로 야유회 갔을때,

김갑수목사님.박옥채전도사님  그리고 청년회 와 함께....

 

 

교회는 점점 부흥하여 인근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초교파 로써 박옥채 전도사님 이 시작을 하셨고 ,

후에 목동에 있던한국침례교 신학대학에서 근무 하시던 김갑수 목사님 께서 합류하시면서 정식명칭이 한국침례회 대석교회로 간판을 달았다.

그때 교회명칭을 뭘로 하면 좋겠냐고 목사님께서 성도님들에게 질문을 하셨는데

그때 내가 제안하기를 대전시 석교동의 약자를 한자씩 따서 대석교회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모두들 대찬성을하여 대석교회의 명칭이 탄생을 하게되었다.

지금은 이 대석교회가 부흥이되어 큰성전을 지어 석교동에서 하나님의 예배처소로서 일익을 담당하고있다.

천막교회에서 조금떨어진 석교동 동사무소 옆으로 새로 성전 을 아담하게 지어서 이사를 하였다.

 학생회도 조직이되어 내가 학생회장을 맡기도하였다.

여름방학 이되면 토요일 학생회예배를 마치고 보문산기도원 으로 온교회성도님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가곤 하였다.

전기도없던 그기도원에서 촛불을 밝히고 빙 둘러앉아 예배를 드리고나면

각자 자리를 찾아 밖으로 나가 통성기도며 찬송가며 각자의 방식대로 흩어져 철야를 하곤 했었다.

신앙심이 깊어지다보니 여름방학때 는 배낭 에 잔뜩 짐을 꾸리고 산상부흥회 같은곳을 찾아 다니기도하였다.

특히 당시 김충기 목사님 의 설교 에 감동을 받아 나도 저런부흥강사 가 되어야지 라고 속으로 생각을 하고 신학교 에 가고픈 마음이 점점 싹이 트기시작하였다.

미국의 빌리그레함 목사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부흥집회를 할 때 당시 기독교방송 의 김장환 목사님께서 통역을 하셨는데 카랑카랑한 목사님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대전충무체육관에서도 빌리그레함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가졌는데 이때 내가 대전지방학생회 부회장을 맡기도하였다.

한국에서 는 침례교 세력이 장로교 세력보다는 약하지만, 미국에서 는 남침례회 세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당시 김갑수 담임 목사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 목동 침신대학 에 입학을하면 자기가 미국 남침례회 로 학교에서 유학보내줄테니 꼭 입학하라고하셨다.

유학같다와서 침신대학 강단에 서던 목회를 하던 함께 하나님 의 일을 해보자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부친께서 는 강력 반대를 하셨다.

나하나보고 돌목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나왔는데 하필이면 기껏 춥고배고픈교회목사 가 되겠다고하니 아버지 입장에선 참으로 기가찰 노릇이었다.

내위의 누님 이 남자였다면 나는 나의갈길을 갔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을 하였다.

내인생의 터닝포인트 가 될뻔했던 순간이었다.

요즈음이니까 교회가 너무 물질만능주의 로 가서그렇지 그때만해도 정말로 소명감없이는 하나님 의 종이 된다는건 쉽지 않을때였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일이겠지만....

난 정말로 이때처럼 순수한 신앙을 평생가졌었으면 좋으련만..(추후기술하겠지만... )

루마니아에서 의 선교사들의 비양심적인 태도 를 보고 너무나 실망이 컸었다.

‘물질앞에 두얼굴 을 가진 위선자들‘ 이라고나 할까?...

물론 참신앙으로 하나님 의 사업을 하는 분들도 정말 많다

개중에 몇몇 성실치 못한분(?)들 때문에 이렇게 전체가 욕을먹는 것이다.

각설하고..

당시엔 무슨 학교대항 행사도 참 많았다

6.25 가되면 전 대전시내고등학생들이 교련복차림에 목총을 어깨에 메고 도청앞에서 대전역까지 시가행진 을 하기도 하였다.

난 이때 교내 중대장을 맡아 중대 구령을 하였다.

근데 어느날인가 뜻하지않게 안면와사증 이와서 얼굴한쪽이 말을 듯지 않는것이었다. 치료를 하기위해서 침도 숫하게맞고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중에 우리집에 세들어사시던 아주머니께서 자기가다니는교회 전도사님 이 계시는데 의학을 전공하여 잘본다고 한번 가보자고 하여 함께가보았다.

그분은 침놓는게 아니고 영어로 된의학서적인데 신경부활제를 하나 추천하여 먹어보라고 하셨다.

그걸복용하고 는 조금씩 움직이기시작하였다.

지금생각하면 왜 복용하다 말았는지 이해가 안간다 계속복용했으면 지금 완치가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정말로 아쉬운부분이다.

웃으면 입이돌아가니 그날이후 나는 웃음이 없는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건 가만히 있을땐 잘표가나지않고 웃을 때만 표가났다

하여튼 학교같다와서는 교회를 안들리면 마음이 편치않을정도로 열심히 교회에 봉사를 하였다.

막상 아버지 와 대화이후 신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나는 이제 어떻게 나의 인생진로를 택할것인가 고민하기시작하였다.

내가 충남공고 자동차과를 택한 것은 어린마음에 대학을 가지않고 일찍돈을 벌어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것이었는데, 중간에 크리스챤이 되면서 신학교를 가고 싶어했다가, 이제는 대학을 가야 사회에서 뭘해도 해먹지 라는 생각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렇게 결정하고 대학에 진학을 하려니 실업계고등학교에선 이게또 쉽지가 않았다.

뒤늦게 진학반에 들어가 진학공부를 하려니 진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결국첫해 에는 예비고사를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진학반에서 화학을 가르치셨던 최문기 선생님덕분에 나는 나의인생진로를 결정하게되었다.

그선생님 처남이 선장인데 당시에는 외국드나들기도 힘들던시절에 외국을 제집드나들 듯이 왔다갔다하면서 구경도잘하고 돈도많이 번다는것이었다.

한반에 60명이 동시에 이 설명을 들었는데 마도로스직업 에 흥미를 느끼는

건 나하나 뿐이었다.모두들 자기진로 는 이미 결정을 하고 진학공부를 하고있었던 것이었다.

그나저나 예비고사에 떨어졌으니 이제 재수를 하는수밖에 없었다.

당시 은행동에 있었던 청산학원진학반에 접수를 하였다.

정말로 재수를 안해본 사람은 재수생의 마음을 모른다.

스스로 자포자기상태 라고나할까?...열등의식 에 빠져 하루하루 가 희망이 없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를 혹시나 길거리에서 마주칠까봐 눈치를 보며 걸었다.

그때 재수생동기가 포장마차 에가서 소주한잔하자고 하여 난생처음 소주를 마셨고, 마신김에 청자 담배도 한 개피 피웠다. 그야말로 뾰-옹 가는거였다.

소주한잔과담배한개피... 그날이후 나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세상에 희망이 없다보니 한잔의 소주와 담배 한개피 가 위로가 되어주었다.

내친김에 주말이면 고고크럽 도 드나들었다. 휘황찬란한불빛 과 귀가찌저지도록 시끄러운 음악. 이모든게 별천지였다.

당시고고크럽 은 4홉들이 맥주병에 막걸리를 담아서 팔았는데 가끔 재수없으면 쉰막걸 리가 나와서 먹고는 배탈이 나기도하였다.

때론 통키타를 치며 노래하는 생음악 라이브 술집 건너마을엔 단골로 다녔다.

음악다방인 은행동의 극동다방은 우리들 아지트였다.

친구따라 중동10번지도 가보았다.참으로 별난세상 들이었다.

청바지에 통키타 며 포크송이 당시 우리들 세대 의 유행이었다.

이종용의 너,송창식의 고래사냥,왜불러,딩동댕지난여름, 김정호의 하얀나비, 이장희의 그건너,어니언스의 편지,샌드패블즈의 나어떻게,양희은의 아침이슬,등등...

당시엔 요즈음처럼 인터넷이니 핸드폰이니 전무하고 오로지 편지 에만 의지하여 소식을 주고받던 시절이었다.

펜팔 이라고 하여 남녀간에 편지로써 교제를 하던시절인데 편지한통쓰러면 갖은 문학적용어를 총동원하여 썼다지우고를 반복하며 한참만에야 편지한통이 완성된다.

초등학교 동창들 중에 는 일찍 사회에 진출하여 돈을 벌고 있는친구 들이있었는데 연락만하면 술은 그친구 들이 돌아가면서 매일 사는거였다.

덕분에 니나노집 이라고 젓가락장단에 맟춰서 노래하는 술집도 다녔는데 그땐 바가지 쓰는게 다반사였다.

우리가 술이 취하면 주인 은 슬쩍 빈접시를 갔다가 끼워넣으면 그게 술값이었다.

하루는 술값이 돈을 모두 모아도 모자라서 한사람만 내일아침에 돈을 가져오기로 하고 집에가고, 나머지모두 는 집에 가지도 못하고 술집에서 볼모로 잡혀서 잠을 술집에서 자기도하였다.

주인은 밖에서 홀문을 잠가버리니 어디로 도망도 못가고 꼼짝없이 철창에 같이는거나 다름없었다.

재수 하면서 하라는 공부 는 안하고 못된짓만 하고 다닌거 같다.

이번에 한국에 귀국하여 옜생각을 더듬으며 옜거리를 돌아다녀봤더니 모두 바뀌어 이제는 아련한 역사의 옜추엌 이 되어 버렸다.

그럭저럭 1년이지나고 다시 입시철이 되었다.

이번엔 원하는대학에 합격을 해야하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고민이 시작되었다.

마도로스가 되기위해선 4년제 인 한국해양대학.부산수대. 2년제인 목포해전.부산해전.수전.등이있는데 어디를 택해야하나 또 고민이였다.

4년제졸업을 해도 갑종2등기관사면허를 딸 수 있고, 2년제를 졸업해도 똑같이 면허는 갑종2등기관사면허를 딸수가 있었다.

4년졸업하고 2면허를 딸바엔,2년졸업하고2면허를 따면 2년더 돈을 벌면 그게 어디냐고 2년제를 가기로 하였다.

그땐 왜 그런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당시 한국해대.부산해전. 목포해전 은 시력이나쁘면 응시불가였다.할수없이

그렇게 결정을 하고 포항수전 기관과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뤘다.

60명중 3등으로 합격을 하였다.

당시 이모가 포항에 사셨는데 이모부 는 포항제철 에 근무를 하셨다.

고등학교 동창도 포철에 입사하여 다니고 있는친구들도 있었다.

딱한번 만나고 는 그후 소식을 잘 모르겠다.

이렇게하여 입학을 하고는 ....

마치 참새새끼가 어미가 물어다준 먹이를 먹고 다자란 새끼가 둥지를 박차고 저 넓은세상으로 날아가는, '이소' 를 하듯 ...

나는 그동안 키워주셨던 부모님 곁을떠나 타향객지생활의 서막이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매일아침 이면 함께 아침밥을 먹곤 하던 자식 이 떠나고 없으니,

자식이 없는 빈방 을 보곤 얼마나 허전해 하셨을까...

루마니아 살땐 큰아들 강석이가 군입대 를 위하여 한국으로 떠나던날 

공항에서 돌아온 집사람은 강석이가 잠을 자던 침대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었다.

이런게 부모의 마음 이겠지....

 

 

-4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