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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의 옜추억

김홍열 의 블로그 2012. 12. 19. 11:05

 

충남도청에서 목척교 를 거처 대전역까지 뻗어있는 '중앙로'는 대전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대전역 부근의 중동, 은행동 일대는 1960-1970년대 대전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였다.

옛 한국산업은행 대전지점 뒤에는 시공관이 있었고 이 건물에 '중앙극장'이 있었다 ,

당시 대전시민들의 휴식처 공간 이였던 극장들을 살펴보면,

역전앞에 있던 아카데미극장, 중앙극장,대전극장,시민관,그맞은편에 청소년회관, 신도극장, 동화극장, 자유극장,중도극장,서대전극장,명보극장,고려극장 등이있었다.

 

중앙극장 통 거리에는 카바레 와 싸롱 이 많았고,

특히 우리가 즐겨찾던 음악다방 은

중앙시장 부근 에있었던 '사랑방다방' 과 은행동 에있었던 '극동다방' 이있었다.

자주다니던 술집은 '진로집'대전극장통에있던'서울튀김집' 한밭식당옆 공터에 있던'돌채' 은행동 '건너마을'등등이 한잔하던곳이었다.

시간만 나면  다방 에 출근하여 하루종일  빈둥거려도 누가 나가달라 소리 를 하지 않았다. 

또한 그때는 ‘고고크럽’이 우리의젊음 을 불태우는 장소이기도했다.

 

유성의 '한국관' 에한번 가보는게 소원이었는데 언제 한번 간다간다 하다, 난 한번도 가보진 못하고 말았다.

고고크럽에선 맥주대신 빈맥주병에 막걸리 를 담아서 팔기도하였다.

재수없으면 쉰막걸리가 나와서 마시고 배탈이 나기도 하였다.

대전역 주변으로 는 일명 ' 중동10번지'가 있었고, 

중앙시장 옆길 은 '화월'이라는 유명한 일식집이 있어 '화월통'이라 불렀고

이곳은 태극당 바로 다음 골목이기도 하다.

 

 이 부근은 또 일명 ‘먹자골목’으로 더 유명했다.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서민들 의 음식이 많았다.

즉석에서 면을 뽑아주는  냉면, 순대국밥,족발,파전,튀김.닭내장탕, 팥죽 등 다양한 먹거리 들을 팔았다.

미군에서 남은 음식으로 만든 '꿀꿀이죽'도 팔았다고하는데, 우리때는 실제로 먹어보진 못했디.

이 주변은 맛있는 음식점도 많았다.

양곡빵을 파는 '오곡당', 클래식 엘피판이 많은 '푸론네 제과'가 있었고,

'성심당' 빵집도 은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이 주변에 있었다.

1960-70년대에는 많은 대전시민 들이 찾았던 대전의 유명한 맛집으로

태극당 과 성심당, 한밭식당, 사리원면옥,진로집 등을 꼽는다.

옛 산업은행 대전지점 인근에는 라사점(양복 옷감파는 가게)과 금은방이 즐비했다.

당시 결혼 예물을 맞출 때는 이곳에 있는 금성당, 보옥당,대광당,보광당 등의 금은방을 즐겨 찾았다.

건너편에 위치한 '기신양복점'과 '금성양복점'은 맞춤 양복으로 유명했으며

지금도 대를 물려가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중앙데파트 와 홍명상가가 들어서기전

겨울방학만되면 목척교부근에 스케이트장이 개설되어 거의매일 스케이트 를 타러갔다.

1974년 대전천의 목척교 부근에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가 완공되면서

상권은 점점 대전역부근에서 서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홍명상가는 대전천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을 이어주는 연결로 역할을 했다.

은행동으로 음식점과 옷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대전역 주변 상권은 점점 은행동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1974년, 1994년 2차례에 걸쳐 중앙로 밑에 지하상가가 들어서면서

은행동 일대는 전성기를 누렸지만

1999년 대전시청이 둔산신도시로 이전하고,

또  충남도청 이 이전할 계획이어서  점차 대전의 동부상권 은 점점 침체기를 맞았다.

 

1970년대 청춘 남녀들이 주로 만나는 미팅 장소는 어디였을까?...

다름아닌 '빵집'이었다.

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두근두근 짝을 정하는 모습은 빵집에서 흔히 볼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탈선의 장소'로 오해받기도 했다.

교복 입은 소심한 학생은 빵집 앞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호랑이보다 무서운 학생주임 선생님 얼굴이 떠올라 괜히 발걸음이 바빠졌다.

또한 당시 젊은 아베크족들의 데이트장소 로는 보문산공원,만수원,산내 순두부집 과 별천지,세천유원지,정도였고

계룡산 동학사는 대전역앞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 를 타고 대전을 벗어나야했다.

 

대전에서 '만남의 장소'로 유명했던 곳은 중앙시장 옆에 있었던 '태극당'이었다.

동네 빵집의 원조로, 당시 달달한 단팥빵을 사려고 온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설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비슷한 시기에 생겨 지금까지 지역의 명소로 자리매김한 '성심당'과 쌍벽을 이뤘다.

하지만 ‘태극당’은 역전 근처의 상권이 점차 활력을 잃어가면서

예기치못한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아스라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태극당 창업자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가 제과·제빵 기술을 배웠다고한다.

해방 전 귀국한 창업자는 6·25 전쟁이 한창일 무렵 대전에서 찹쌀떡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누구나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 태극당의 빵은 인기가 높아 찾는 이가 많았다.

처음에는 대전 동구 중동 한의약거리에다 '태극당'을 짓고 운영을 시작했다.

장사가 잘 되자, 중앙시장 앞으로 확장이전 을 했다.

1970년대 후반 최고 전성기 시절의 태극당은 4층 규모의 건물 이었다.

1층에는 빵을 진열하고, 2층에는 빵을 앉아서 먹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3층에는 모든 빵을 직접 제조하는 공장이 있었다.

4층에는 '돌체'라는 음악 학원이 있었다.

 

1960-1970년대만 해도 먹을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 당시 대전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 은 태극당과 그 에얽힌 추억을 다수 간직하고 있다.

이곳 2층 은 수많은 남녀가 선을 보는 만남의장소 이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자 태극당에 어두운그림자 가 비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고는 전기로 인한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큰돈을 들여 매장 인테리어를 바꾸고 ,당시11월 연합고사를 앞두고 며칠간 밤새 준비한 떡과 엿 그리고 포장재료 가 모두 타버렸다.

두 번째 사고는 1985년 5월 어린이날을 앞두고 5개 초등학교에서 단체 주문이 있었는데 어린이 150여명이 그 빵을 먹고 집단 식중독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원인 은 높은온도 에 상하기 쉬운 생크림빵 때문이었다.

주문 당일 에 빵을 만들어 배달했는데 그 날 따라 유달리 날씨가 더워 햇빛에 오래 둔 생크림빵 이 상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전국 뉴스에 실릴 만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태극당은 대전 ‘동구청’에 의해 강제로 영업 이 취소 되었다.

 

1년 뒤 같은 장소에 다시 가게를 열었지만 장사는 예전 같지 않았다.

홍명상가 와 중앙데파트 가 생긴 후 주요 상권이 은행동쪽으로 옮겨져 행인은 점점 줄어들었고, 대전역 주변 상권도 죽어갔다.

결국 태극당은 1997년 문을 닫게 된다.

배고팠던 서민들과 함께 울고 웃어온 태극당.

빵집은 문을 닫았지만 당시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우리세대 들은 태극당의 달콤한 빵 뿐 아니라, 젊은 날의 ‘사랑과우정’을 이곳에서 싹 티운 '첫사랑 의 아름다운 추억’ 들을 아직도 마음속 기-잎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성심당' 은 꾸준한 맛의개발과  꾸준한 손님들 덕택에 발전에 발전 을 거듭하여 지금은 대전에서 유명세 를 계속 유지하고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초창기 대전역 의모습.

 

 

일제시대 대전역에서 시내를바라보고 찍은 당시 대전의모습

 

 

 

6.25전쟁 당시의 대전역

 

 

 

6.25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당시 대전시내모습......

그러나,당시 '충남도립병원' 은 파괴되지않고 운좋게도 그대로 있다.

 

 

1958년8월20일 대전역사 준공식

 

 

 

1960년대의 대전역

 

 

1970년대의 대전역 지하상가입구

 

 

 

1958년 부터 2004년 까지 사용되었던 대전역

 

2004년 KTX 개통에 따라 신축된 대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