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2월.묘금국민학교 입학 하던날.
8살이 되면서 왼쪽가슴에 ‘묘금’ 이라고 어머니께서 손수 뜨개질로 글씨를 만들어 명찰처럼 붙히고 ,
부모님손에 이끌리어 묘금초등학교 에 입학을 하였다.
1학년 입학을 하고 나니 여러마을에서 또래들이 모여서 한교실에서 공부 를 하는데 서로가 낫이 설다보니 처음에는 무척이나 서먹서먹 하였던 분위기가 생각이 난다.
그때 묘금국민학교 로 학교 를 다녔던 인근 의 마을이름 은 다음과같다.
새터,안돌목,바깥돌목,괴골,고당,당재날망,메주골,쇠종골,방하골,도내,새분이,순내미,삼거리 등인데, 비가오나 눈이오나 우리는 6년간 을 이 시골길 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도시 에서는 한학년이 몇개반 이나 되다보니 동창 이라도 서로 얼굴 을 모르는경우도 있을테지만, 우리는 딱 1개반이 6년간 을 한교실에서 남.여 가 공부 를 함께 하다보니, 남자든 여자든 다 같은 식구처럼 정이 들었었다.
입학을 하여보니 개중에는 훌쩍거리면 누런코가 콧구멍에서 들락날락 하는아이, 손등 에 때가 거북이등처럼 쪄러붙어서 손등이 터져 쩍쩍 갈라져 있는아이, 한쪽 다리 를 잘 쓰지못하는 아이, 하얀 이 가 머리에 왔다갔다하는 여자아이....하여튼 당시에 우리들이 살던 그시절에는 모두가 경제적 으로 어려웠던 시골생활 이었다.
농사지은 곡식 이외에는 별 먹을군것질거리가 없던 그시절 , 봄이오면 산에서 칡 을 캐서 그 칡 을 질겅질겅 씹기도 하였다. 그때는 집집마다 고구마농사 를 많이 했는데, 웃방에다 아예 고구마 통가리 를 해놓고, 이 고구마 는 겨울에 간식용, 밤참용,군것질용 등등 다양하게 우리 의 겨울입맛 을 돋구어 주었다. 가을이면 감 을 깎아 말려서 꽂감 을 만들기도하였고, 홍시나 밤이나 호두 를 보관해두었다가 손님이오면 겨울간식거리로 내놓기도 하였다.
하여튼 우리는, 묘금국민학교의 1학년 동창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에 담임선생님 의 성함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가 연필을 못깎으니까 친절하시게도 손수 우리들의 연필 을 일일이 깎아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국어,산수,사생,자연,음악,미술,....교과서도 타고, 양철필통,색연필,도화지,등등 학용품도 준비 를 하였다.
나는 유일하게 등에 메고다니는 당시엔 ‘똥가방’ 이라고 하는걸 메고 학교에 다녔는데, 다른 남자 아이들은 헝겊으로된 책보에 싸서 어께 에 메기도하고, 여자아이들은 허리 에 메고 다니기도하였다.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5 리 정도 떨어졌는데, 개울이 굽이쳐 흐르다보니 여섯 번씩 이나 같은개울 의 징검다리 를 건너야 했다. 학교가끝나고 방과후 집에올땐 가끔씩 동네아이들이 여럿이 모여서 ‘희용골’ 이라는 산을 넘어서 오기도하였다. 여름에 홍수가나면 물을 건널수 가 없어서 학교에 가지못하고 집에서 개울물이 빠질때까지 몇일 을 기다려야 할때도 있었다.,
겨울에는 징검다리가 얼어서 얼음으로 덮어버리면 건너다 미끄러져 물에 빠져서 꽁꽁언발 을 학교가서 난로에 녹이기도 하였다.
당시 함께 입학을 하였던 우리 ‘양저리’ 동네 동창들의 이름을 적어볼까한다.
본인김홍열.홍명의.임용구.최정원.안경출.강홍순.문영철.김삼동.안인철.정진경.김동구.김병주.김명열 이상이 남자동창이고,
여자는 임매순.안상니.임태순.유용자.유명순.안연순.송진분. 합하여 20명 이나 되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보통 서너명씩 아이 를 낳다보니 제법 동네꼬마들 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이중엔 벌써 세상을 떠난 동창도 있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연락이 안되는 친구도있다.
그럭저럭 세월이흘러 3학년때 처음으로 우물안 개구리들이 세상구경을 떠나는 여행을 하였다.
경북 김천에 있는 직지사 로 단체수학여행 을 가게되었다. 20리 를 걸어서 심천역에서 칙칙폭폭 완행열차 를 타고 김천역에서 내렸다. 직지사에 도착하니 아름다운 사찰이 감명깊었었고, 오래된 고목나무들이 사찰 주위로 울창하게 들어서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여럿이 장난을 치다가 하필이면 내가 , 어느 사진사 가 바쳐논 사진기 삼각다리 를 건드려서 넘어뜨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렌즈가 깨지고 하여 사진사 는 난리가 났다.
이 사진기가 그분에게는 식구들 먹여살리는 밥줄인데 그사진기 의 중요한 랜즈가 박살이 났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우리는 모여서 선생님들 한테 무좌게 혼이 났던 생각이 난다. 그 랜즈댓가 로 당시 쌀한가마값을 물어줬다고 훗날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셨다.
이일로 인하여 집에와서 혼날줄 알았는데, 아버지 와 어머니 는 나에게 한마디도 혼 을 내지 않으셨다.
당시 아버지 는 돌목에서 농사 를 지으셨고, 작은아버지는 안남면사무소에서 호적계에 근무하시는 공무원 이셨다. 아버지 는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꼭 소에다 쌀 2가마 를 싣고서 30리나 떨어진 작은집 에 같다주시곤 하셨다.
나도 가끔 시간이 맞으면 아버지와 함께 그 30리 시골길 을 산넘고 물을건너 다녀오곤 하였다.
지금생각해도 아버지 와 작은아버지 는 참으로 형제간에 우애가 깊으셨던거같다. 가끔 우리집에 작은 아버지 가 오시면 꼭 안방에서 형제간에 맞절 을 하면서 안부 를 서로 묻곤하시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 에게도 우리형수님 하시면서 굉장히 잘하셨다고 한다.
그런 작은 아버지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고 생사 를 모르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날은 아버지 와 어머니가 대판 부부싸움 을 하시고, 아버지 는 밖으로나가시고, 어머니 는 뒤마루 에서 수건을 얼굴에 덮어쓰고 울고 계실 때....
하필이면 작은아버지가 그때 우리집에 오신거였다.
뒤에서 어머니가 우시는 모습을 보고는 방에들어오시지도 않고, 그길로 나가셔서는 작은집에도 안들어 가시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이 생사 를 모르고있다.
몇일후 한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무주우체국’ 의 소인이 찍힌 작은아버지 에게서 온 마지막편지였다.
내용은 ‘ 짧은인생 부부간에 싸우지 마시고 살아가시라’ 는 내용이었다고한다.
먼훗날 아버지에게 들어보니 아마도 작은 아버지가 그때의 아버지어머니 부부싸움 이 작은집 때문에 싸운줄알고 오해 를 하신거 같다고 하신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작은아버지 를 평소처럼 부부싸움 표 를 안내고 반갑게 맞이했으면 별문제가 없었을텐데,....
작은아버지가 형수님 을 몇 번을 부르며 왜그러느냐고 말을 붙혀도 본체만체 대꾸 를 안하니.... ,
작은아버지 입장에서 는 자기네집 때문에 싸운줄알고 오해를 할만도 하였다.
그길로 몇 년간 별 수소문 을 다해보았지만, 작은아버지 의 행방 은 알길이없고 지금까지 생사 를 모르고있다.
이제는 얼마전부터, 돌아가신걸로 하고 제사 를 모신다고 4촌 에게서 들었다.
한문도 잘아시고,붓글씨도 잘쓰시고,인격도 훌륭하시고,미남이시고,키도크시고,목소리도 굵직 하시고....
정말로 멋쟁이 작은아버지 이셨는데....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인생사가 그렇듯이...작은아버지 가 안계신 작은집 은 그후로 작은엄마께서 4촌 들 키우느라고 참 많은 고생을 하셨다.
이제는 다들 장성하여 각자들이 잘들 살아가고있다.
아버지 밑에 다른 남동생분이 또 한분 계셨는데 어느날 학교 갔다 오더니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뒹굴더니 다음날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마도 급성맹장 이었나보다.
지금 은 의술 이 발달하여 급성맹장이 바로 수술만하면 별거 아니지만 , 예전엔 시골에선 이렇게 갑자가 아프게되면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고한다.
그저 안아프고 건강하게 사는게 참으로 하늘이 주신 큰복이었다고한다.
아버지께서 는 열심히 농사 를 지으시어 돌목 의 논과밭 이 매물 로 나오면 땅 을 하나씩 하나씩 매입 을 하셨다. 그러다보니 한참 바쁜 농번기 에는 , 머슴 을 2명씩 두고 농사 를 지으시기도 하셨다.
어느날인가 바쁜농사철에 논에 농약을 혼자 하루종일 치시더니 저녁에 아비지께서 갑자기 이상하신거였다. 토하기시작하더니 말도잘 못하시고 전신이 굳어지기시작하는데 어머니께서 보시더니 농약에 중독이 된거 같다고 하시면서, 큰집 에 ‘장로형’ 에게 예기하여 대전에 있는병원 으로 어떻게좀 속히 가자고 말씀 하시는거였다.
장로형 은 급히 동네 청년들 을 소집하여 급히 들것 을 만들고...
20 리 나 떨어진 심천역 으로 열차 를 타기위해, 아버지 를 들것에 눕히고
교대로 뛰기 시작하였다.
밤12시경에 심천역에 도착하는 군용야간열차 를 타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께 운명 의 여신이 도와주셨던지, 다행히도 열차가 한 20분정도 연착을 하는 바람에 그열차 를 탈수 있었다.
열차가 정시 도착하여 정시에 출발하였다면 아버지 는 그열차 를 타지 못하셨을것이었다.
아버지 께서 는 이미 배설 을 하고계셨기 때문에 객차내부 로 는 냄새가 나서 못들어오게하여, 객차통로 에서 차가운밤바람 을 맞으며 대전까지 가셨다.
대전에 도착하여 대전역앞에서 택시 를 잡았는데 그택시기사 가 또 참으로 고마운 사람 이었다.
그 냄새나는 아버지 를 승차거부 하지 않고 ,기꺼이 태워서 대전도립병원 까지 친절하게 실어다 주는것이었다.
이 긴박한 순간에 만약에라도 태워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들이 많았는데 정말로 너무나 그분이 고마왔다.
병원에 도착하니 당직 의사들이 여기저기 를 찾아보더니 농약 을 해독하는 독일제 주사약이 딱하나 남았다고 하는게 아닌가.!
이미 그때 아버지 는 거의 혈압이 떨어져있었고 호흡도 불규칙한 마지막 사투 를 벌이고 계셨다.
현재 내가 보관 하고 있는 작은아버지 의 유일한 흔적 이다.
숙부님 께서 어린시절 돌목에서 공부하시던 '천자문' 책 인데
위에서 보이듯이 '千子文' 이라고 직접쓰신 어릴적 한문필체 가
보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