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열 의 자서전 제12부
1988년9월25일 미국 뉴 올리언스에서 중간귀국 을 하고,
언제 모집공고 가 나오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1988년11월17일 자 서울신문 에 모집공고 가 나왔다.
그동안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육상근무를 하기위한 첫발을 내딛기 위해
88년11월23일 ‘특수법인 한국어선협회’ 에 응시원서를 접수 하였다.
막상 신문을 보니 기관검사원 은 2명을 뽑는다고 나와 있었다.
치열한 경쟁 이 예상되었다.
응시자 중 에는 진짜 실력파 도 있을테고
배타기 실어서 괜히 한번 응시해 보는 사람도 있을테고
나처럼 진짜 죽기 아니면 살기 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비한 사람도 있을테고
과연 결과 는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가슴이 설레이고,
밥맞도 없고,
잠도 안오고,
연일 스트레스 가 보통 쌓이는게 아니었다.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먼훗날 집사람 이 예기 하는데 집사람도 나름데로 긴장 했다고 한다.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 을 보고 간절히 기도 도 했다고 도 했다.
그래도 접수후 시험볼 때 까지 문제집 을 열심히 풀고 밥만 먹으면 달달달 책을 읽었다.
한국에 귀국해서 TV를 보니 당시 전두환 대통령 에 대한 ‘5공청문회’ 가 연일 방송 에 나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 의 기억 이 남는건 장세동 씨 의 그 름름한 자세 가 지금도 기억 에 선하다.
서슬퍼런 청문회 가 매일 진행 되다보니 전반적인 사회적 공직사회 의 분위기가 서로 몸조심 하느라고,
그야말로 그 누구에게도 무슨 부탁 내지 청탁 같은 것은 아예 통하지가 않았다.
그전에는 거의 누구누구 권력 이 있는 사람들 의 추천 에 의해서 모집 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에는 거의 모든 다른 직장 들도 소위 ‘빽’ 있는자 들의 출세길 이 보장 되던 시절 이었다.
요즘은 정말로 세상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긴한데
아직도 정부 고위직 정치인들 에 의한 인사청탁 이나
채용비리 가 아직까지도 있는 모양이다.
연일 뉴우스 를 장식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하는말 인데
모집공고 를 자세히 보면 ‘한국어선협회 공고 제1호’ 라고 되어있다.
사람 은 누구나 인생 을 살다 보면 3번 은 ‘기회’ 가 온다고 한다.
나는 어찌 보면 ‘5공청문회’ 의 덕을 본 사람 이라고 할수 있다.
그 이유 는 청문회 때문에 당시 권력 있는자 들의 몸사리기 작전 으로 인하여 그 누구도 추천 또는 청탁 이 전혀 없었다고 훗날 누군가 예기 하는걸 들었다.
만약, ‘5공청문회’ 가 없었더라면, 그전 처럼 또 ‘빽’ 있는 누군가 가 추천을 받아서 나대신 합격 을 했을거라 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때 순전히 실력으로 함께 합격했던 우리 입사동기 들은 나름 자부심 이 있었다.
‘한국어선협회 공채 1기생’ 으로써 타의 모범 이 되는 근무를 하였다 고 생각한다.
드디어 필기시험 보는날!
문제지 를 받아보는 순간 죽 훑어 보니 그동안 공부 한데서 아는 문제 들이 많이 출제 가 되어서 편하게 시험을 치렀다.
필기 를 합격하고,
면접 까지 무사히 마치고,
이제 최종 합격자 발표 만 남겨 놓았다.
주사위 는 던져졌고,
‘합격이 되면 좋고, 떨어져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라고 위안을 스스로 해 보기도했다.
하루 이틀 눈이 빠지게 얼마 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 이 이또한 사람 애간장을 태웠다.
얼마를 더 기다리니 드디어 한국어선협회 로부터 한통 의 등기 우편 이 도착 하였다.
뜯어보니......
‘최종 합격 통지서’
였다.
뛸듯이 기뻤다.
세상 이 달라져 보였다.
이번에는 오히려 너무 기뻐서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그동안 승선중 에 짬짬이 공부하고 노력한 보람 이있었다.
학교 졸업 후 처음 승선하여 죽도록 고생 하였던 참치잡이 배 원양어선인 해창18호...
인도양 에서 사이클론 을 만나 죽을뻔한 지옥에서 살아나온 나탈리호....
순간 만감 이 교차 하였다.
이젠 그런 걱정 이 없으니 얼마나 감개무량 한지
지난 추억 이 감사했다.
그동안 떨어져 지내며 알게 모르게 고생 했던 집사람 도 나보다 더 좋아했다.
얼마후 정식 으로 임용 이 되고
본부 에서 1989년3월1일부터 8일 까지 연수교육 을 받았다.
그리고, 1989년3월9일 자로 첫 부임지 제주도 로 발령 이 났다.
직원 으로는 지부장. 행정원.행정보조2명.선체검사원2명,기관검사원2명,기사1명. 모두 9명 이었다.
위치는 제주시 동문 로타리 부근에 ‘제주상호신용금고 2층’ 에 사무실 이 있었다.
청양 처갓집 에서 제주도 로 집사람 과 강석.강민 을 데리고 이사를 하였다.
제주도 에는 이상한 풍습 한가지 가 있는데,
이사철 이 되면 ‘신구간’ 이라는 날짜 를 한1주일 정도 정해 놓고
그 기간 에 제주도민 전체가 한꺼번에 이사를 가고 , 이사를 오고, 한다.
나도 그기간 에 맟춰서 칠성통 에 월세를 얻어 이사를 와서 꿈에그리던 첫 육상근무 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학교졸업 후 죽 배만 타다가 아침.저녁 으로 출퇴근을 하다보니
처음엔 좀 어색하기도 하고, 아직 실감 이 나지 않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퇴근 하니 집사람 이 맛난 저녁밥상 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행복한 시간 이었다.
관할구역 은 제주도 일원 과 추자도 까지 업무관할구역 이었다.
제주도 각 항포구 와 지리적 도로 를 파악 하는데 주력을 하였다.
제주도 도로 중 에는 슬프고 기가막힌 사연이 있는 도로가 하나가 있다.
제주시 에서 서귀포 로 넘어가는 도로 중에 ‘성판악’을 거쳐가는 ‘5.16도로’ 라는게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에 구치소 에 있던 죄수 들을 데려다가 중장비 지원 하나없이 마치 열대지방 밀림숲 같은 지역을 순전히 맨손으로 작업하는 ‘톱,곡괭이 와 삽’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들 의 피눈물 나는 노고 가 참 대단 하다고 생각이 든다
처음엔 울퉁불퉁 열악한 도로였지만,
후에 확장 이되고,
아스팔트 로 포장 이 되고,
지금은 제주도 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로가 되었다.
5월 엔 한라산 으로 전직원 등산 단합대회를 하기도 했다.
영실코스 로 입산하여 정상에 도착해 보니 사진 으로만 보던 백록담 이 눈앞에 있으니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후로 아직 백록담 에 다시 가보지 못했는데,
더 늙기 전에 한번 기회를 만들어 가보고 싶다.
신분 이 준공무원 신분 으로써 공적업무를 하다보니 행동에 조심스러운 부분 들도 많았다.
제주도 가 관광지 이다 보니 아는분들이 육지에서 관광 왔다가 그것도 언제 간다고 미리 예기하는것도 아니고 도착해서는 예고없이 갑자기 연락이 와서 입장 이 아주 곤란 할 때 가 한두번 이 아니었다.
모처럼 제주 에 와서 연락 하는데 안나갈수도 없고,
그러자니 미리 선약 했던곳 은 약속을 깨야하고...
하여튼 초기 에는 손님접대 하느라 애로사항 도 참 많았다.
과장법을 좀 쓰면 ‘사돈의8촌’ 까지도 연락 이 왔다.
처음엔 반가운 마음에 서부두 횟집 에가서 멋지게 대접도 하곤 했는데,
으레 생색을 내며 횟값은 내가 지불을 하곤 하였지만
그러자니 이게 횟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나에겐 부담 으로 돌아왔다.
얼마 가 지난 후부터 는 연락오면 모두 만나지 않고 선별하여 적당히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았다.
요령이 생겨 출장가야 된다고 핑계를 대곤 하였다.
마음 이야 다 반가운 사람들 이지만 다 응대를 하자니 물심 양면 으로 피곤 하였다.
손위 둘째 처남께서 승용차를 구입하면서 타시던 오토바이 를 공짜 로 선물 을 받았는데 이걸 제주 로 가져와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 하였다.
온가족이타고 들로,산으로,바다로,돌아다녔던 오토바이...
당시 승용차 가 없던 나에겐 기동성 이 매우 좋은 교통수단 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 이 어리다보니
내앞에 막내. 나. 큰애. 집사람.이런순서 로 일가족4명 이 일요일 이면 오토바이 한 대 에 다타고 이곳저곳 잘도 돌아다녔다.
지금이야 안전 때문에 못타게 할테지만,
그땐 도로 에 차도 별로 없었고
그렇게 돌아다녀도 누구하나 말하는사람 도 없었다.
자연환경 이 오염 되지않고 같은 한국 이지만 다른나라 의 별천지 같은 섬 이었다.
지금 은 차고 넘치는 중국인 관광객 때문에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 가 되어 버렸다.
추자도 로 출장 을 갈때는 제주 - 목포 간 운항 하는 여객선 으로 들어갔다가,
나올때는 제주-추자도를 운항하는 헬리콥터를 타고 나오기도 하였다.
성산포 일출봉 에서는 헬리콥터 관광 상품 이 있었는데
신혼부부 를 태우고 관광을 하던 헬리콥터 가 절벽 에 너무 근접비행을 하여 날개 가 암벽에 부딭혀 추락 하는 사고 이후 운항 이 금지 되었다.
아이들 이 제주 북초등학교 에 다녔는데 아이들끼리 친구 가 된 것이 어른들 끼리 도 친구 가 되어 지금 까지도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는 가족 이 있다.
추자도 로 여름방학 엔 가족끼리 휴가 를 함께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 가족 하고는 저녁이면 함께 어울려 생맥주도 마시고 ‘오예’ 하며 칠성통을 누비고 다녔고,
탑동 에 있는 ‘무진장횟집’에서는 회를 무진장 먹기도 하였다.
출장 갔다가 소라를 좀 얻어 왔을땐 우리집에 불러서 소라를 삶아서 술안주 하며 밤12시가 넘도록 ‘한라산소주’ 를 마시던 추억이 생각난다.
내가 세들어 살전 주인집 예기 를 좀 해야겠다.
그 남자 주인 의 술버릇 이 참 희안한 사람 이었다.
술을 안마시면 평소에는 내얼굴도 쑥쓰러워 제대로 못쳐다보는 사람인데
저녁만 되면 어디서 술을 한잔 걸치고 와서는 마누라에게 술주정을 하며 마누라 를 들들 볶아댔다.
어느날 인가 보니까 대문에 딱 들어오는순간 신고있던 신발을 벗더니
대문 에서 집 거실로 향하여 신발을 냅다 집어던지며 ‘여보!’ 를 외쳐 되었다.
그사람 술마시고 오는날 은 집주위 가 온통 시끄러웠다.
훗날 들려오는 소식을 들어보니 결국 그 부부 는 이혼을 하였다고 한다.
제주도 주위 에는 제주도 소속 섬 들이 제법 몇개 된다.
추자도, 우도, 비양도, 가파도, 마라도,...
모두 사람 이 살면서 주로 어업 에 종사 를 하고 있다.
제주도 는 철마다 또 지역마다 다르게 고기 가 잡힌다.
방어,복어,한치오징어,갈치,옥돔,자리돔,삼치,조기 등이 주로 어획 이 되고 있다.
제주도 사투리 는 들을수록 신기하고 생소한 단어가 많아 이해 하기가 어렵다.
“햇볕 은 쨍쨍 모래알 은 반짝” 을 제주도 사투리로 말해 보면..
“빗은 과랑과랑 모살 은 빈쯕” 이다.
제주도 는 화산섬 인데 솟아나는 생수 는 참 으로 물맛 이 일품이다.
모든 생활 필수품 은 육지에서 들여와야 하기 때문에 가격은 육지보다 좀 비싼 편이다.
제주도를 가기 위해서는 항공편 과 선박편 이 있는데,
선박편 은 인천,목포,완도,부산에서 출발하는 여객선 편으로 들어 갈수 가 있다.
인천에서 출발 하던 세월호 사건 이후,
인천에서 가는 다른 여객선 이 계속 운항 이 되고 있는지 는 잘 모르겠다.
그때 함께 근무했던 행정원 은 술 을 참 좋아 하는 사람 이었는데
하루는 저녁 에 직원들 회식 이 있었다.
1차 로 식당 에서 저녁을 먹고 각자 헤어졌는데,
다음날 출근 할때 보니 행정원 얼굴 이며 옷차림새 가 이상했다.
얼굴 은 온통 모기에 띁겨서 벌겋고,
옷은 흙투성이 로 범벅 이 되어 있었다.
알고봤더니 2차로 술을 한잔 더 하러갔고, 술에취해 집에도 못가고 동문로타리 에 있는 동문시장 입구 길바닥에서 잠들었던 모양이다.
아침 에 정신이 들어 보니 지갑도 없어지고 차비 도 없고 집에갈 염치도 없고 아예 그길로 사무실로 바로 왔단다.
재미있었던 추억 의 한페이지 였었다.
한번은 사무실에 도둑이 들은 사건도 있었다.
그날따라 나도 지갑을 책상 서랍에 넣고 왔는데 다음날 출근 하여보니 사무실 이 온통 난리가 났었다.
내지갑 도 없어지고 사무실 금고도 열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열지는 못하였다.
몇일후 서울 남대문 시장 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왔는데
도둑놈 이 어디서 훔친 100만원짜리 수표를 사용하면서 뒷면에다
훔쳐간 내 주민등록증 신상정보 를 이서를 한 모양이었다.
옷을 사고 나머지 는 현찰로 받아 갔다고 한다.
가게주인 이 수표를 은행에 가지고 갔더니 도난수표 로써 지급정지 된 수표 였단다.
도둑이 잡혔는지 그후 소식 은 모르겠다.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미등록어선 일제정비기간' 에는 목포자부 와 완도지부 로 파견근무 를 나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어느듯 3년 이란 세월이 흐르고 그동안 정들었던 제주도 생활을 1992년2월16일 자로 마감을 하였다.
부산지부 로 발령 나다
1992년2월17일 부산 영도 에 있는 사무실로 첫 출근을 하였다.
인사이동 에 따른 첫 상견례를 위하여 저녁에 단체 회식을 하였고
각자 자기소개 시간 이 있었다.
직원으로는 지부장.차장.총무.행정원.행정보조2명.기사.선체검사원6명,기관검사원6명.
모두18명 이 근무를 하였다.
제주도 보다 직원수 가 배나 많았다.
사람이 많다보니 민원접수 하러온 선주 들까지 겹쳐서
아침 출근시간 엔 사무실 통로 가 공동어시장 처럼 늘 시끌벅적 하였다.
전날 접수된 검사물량 이 각 검사원 앞으로 배정이 되면,
우리 는 검사장비 를 챙겨서 현장으로 출동을 한다.
당시 검사의 종류를 열거 하자면, 정기검사.중간검사,임시검사,제조검사,예비검사 등이 있었다.
정기검사 : 4년마다 정기적 으로 받는검사
중간검사 : 정기검사 중간 에 2년 마다 받는검사
임시검사 : 지적당한 것을 받는검사
제조검사 ; 선박을 새로 신조선 할때 받는검사
예비검사 : 선박 에 들어가는 부품 또는 완성품 에 행하는검사.
여기서 잠깐 한국어선협회 의 설립동기를 살펴봐야겠다.
1975년겨울, 76년겨울, 동해안 명태잡이 어선들 이 출어 했다가 기상 이 갑자기 나빠져서 거친 풍랑 속에서 많은 소형 어선들이 연달아 전복 침몰 되는 사고 가 있었다.
이때 많은 어부들 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 사고 이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의 특별지시로 어선에 대한 안전문제 가 거론되어 일본어선협회를 롤 모델 로 하여 협회 설립 의 기초 가 되었다.
한국어선협회설립.
1977년 12월 31일 어선법 제정 공포.
동법 제21조 규정에 의거
1979년 1월 ‘특수법인 한국어선협회’ (비 회원단체)가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어선협회는 어선의 정부검사업무 대행과 기술개발 및 연구사업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지부 관할지역 으로는 부산광역시일원.양산.울산 까지 가 업무관할지역 이었다.
부산으로 이사를 올 때 어디에다 집을 얻을까 집사람 과 상의를 하였는데
영도에 집을 얻으면 내가 출퇴근 은 편리한데, 집사람은 동래쪽으로 얻고 싶어했다.
내가 양보를 하여 남산동 에다 집을 얻었다.
아이들 은 청룡초등학교 로 전학을 하였다.
당시 나의 출퇴근 방법 이 좀 특이 하였다.
남산동에서 지하철 로 시청앞 까지 타고가서,
지하철 역 출구쪽 가로수 은행나무 에다 쇠사슬로 묶어두었던 오토바이를 타고, 영도다리를 지나 사무실로 출근을 하였다
반대로 퇴근때는 오토바이를 사무실서 타고와서 다시 가로수에다 묶어두고 지하철 로 집에왔다.
지하철역에서 영도 사무실 까지는 걷자니 좀 먼거리 였고, 시내버스 노선 도 안맞았고, 그렇다고 매일 택시를 탈수도 없는노릇 이었다.
근 1년여를 이렇게 출퇴근을 하였다.
그나마 나는 오토바이 가 있어서 그걸타고 검사업무 현장 까지 기동성 있게 다녀 올수가 있었다.
부산 은 차가 막히는 시내지역을 자주 통과 해야했고, 업무지역 이 광범위 하여 기동성 이 있어야 했다.
그 무렵 한국의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My Car 시대 가 오고 있었던 시점 이었다.
직원들 도 하나 둘 차를 구입 하는 사람 이 생기기 시작 하였다.
나도 차를 하나 구입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현대자동차 중고 프레스토를 150만원 에 주고 샀다.
처음 구입한 150만원 짜리 중고 프레스토 승용차!...
고속도로서 최대시속120km/h 밖엔 안나갔다.
이때 기분도 삼삼 하게 좋았다.
나도 드디어 마이카 대열에 들어섰으니,
주말이면 부산인근 이곳 저곳 으로 가족 나들이를 다녀 오곤 하였다.
차가 있으니 생활 패턴 이 달라졌다.
가고싶은곳 이 있을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어디든 시동을 걸고 즉시 달려 갈수가 있었다.
차가 생겼으니 이제 출퇴근 노선 은 구서동에서 문현동 까지 연결 되는
도시고속도로 를 이용 하였다.
사무실 운동장 에 주차시키는 직원들 의 차 가 한대, 두대 늘어 나면서
직원 상호간 에 대화 의 주제 가 한동안 은 내차는 어떻고 네차는 어떻고 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시간 이 많아 지기도 했었다.
직원중 ‘명’모 검사원 은 운전할 때 실내화를 신고 운전하는사람 이었는데
하루 는 운동장에 그양반 차는없고 구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퇴근할 때 차 실내화 로 바꾸어 신으면서 구두를 밖에 벗어놓고 그냥 문닫고 휭 가버린 것이었다.
차 지붕위에 서류가방 잠깐 올려 놓았다가 그냥 출발해서 가방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고,
타이야 가 빵꾸 가 나도 못갈아 끼우는 사람도 있었다.
'박'모 검사원 은 할부 로 새차를 빼와서 는 운동장에서 고사 지내고
좋다고 그날 퇴근 하다가 사고 를 낸 사람도 있었다.
마이카 시대 에 들어서면서 초창기 재미난 애피소드 도 많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자동차과 를 나와서 차에 대해 어느정도 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 은 승용차 가 생소 하였을 것이다.
직원 중에 ‘차장’ 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 이있었는데,
이양반 이 또 재미난 사람 이었다.
직원들 잘못한 내용만 자기 다이어리 에다 빼곡이 적어논게 우연히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때는 직원 들이 돌아가면서 숙직실에서 저녁에 숙직을 서던 시절 이었다.
당시 숙직을 서던 사람 이 ‘차장’ 책상 위에 펼쳐진채로 있던 다이어리를 보고 읽어보니 직원들 안좋은 내용만 죽 적혀 있더라는 것이다.
그게 알려 지면서 그날이후 그 ‘차장’ 은 소위 ‘왕따’를 당하는 신세 가 되었다.
퇴근할 때 책상 위에는 깨끗이 치우고 퇴근하게 되어있는데
그양반 잠시 외출 했다가 들어오지도 않고 그냥 퇴근 한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암튼 적혀있던거 알려진거 보면 유치한거 만 적었다.
출근을 늦게했다. 졸았다, 큰소리로 떠들었다. 책상서랍 살살 안닫고 크게 탁탁 닫았다, 껌을 짝짝 씹었다, 등등...
옜날 중학교 학창시절 에 반장 이 적어서 담임 선생님 에게 제출하여 명단에 있던 학생들 은 혼이 나기도 했었는데 그 생각이 절로 났다.
여기서 잠깐 당시 민원인 들이 부르는 '선박 검사원' 에 대한 호칭 에 대해 재미난 애피소드 를 좀 이야기 해 볼까한다.
민원인들 은 '선박검사원' 을 부를때 '원' 자 는 빼고 그냥 '검사' 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다른 직종 의 검사원 들 도 민원인 들이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특히나 선박직종 의 검사원 은 민원인 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늘 우리 를 그렇게 불렀다.
옜날부터 호칭 에대한 관행 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부산 남항 에 계류된 쌍끌이 기선저인망 검사 를 마치고
충무동 다방에 들려 시원한 차한잔 을 마시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선주 는 계속 나를 부를때 마다 '김검사님' 이라고 불러 대었다.
근데 공교롭게도 옆 테이블 에 경찰복장 을 한 사람 과 평상복 입은 사람 이 앉아 있었는데
말끝마다 '김검사님' 하고 불러 대니, 그들이 자꾸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결국은 그들은 내눈치 를 슬슬 보더니 차를 다 마시지도 못하고 바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호칭문제는 좀 민원인들 스스로 '원'자 를 끝에 붙혀서 불러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검찰청 검사 쯤 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부산지부 에 근무 를 하면서 현장 에 자주 돌아다니다 보니
전에 함께 승선했던 옜 동료들 을 오다 가다 우연히 길거리 에서 또 현장 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다.
이름 까지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다.
- REINA NAVEGANTE 호 선 장 : 영도 길거리에서 만났는데 당시 연세 가 좀 드셨는데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 REINA NAVEGANTE 호 2기사 : 모 수산회사 총무 로 근무 하고 있었다.
- 원양어선 동원909호 갑판원 : 충무동 냉동 공장 에서 지게차 운전 하고 있었다.
- 원양어선 해창18호 갑판원 : 충무동 남항 에서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 먹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한번 은 저녁에 회식 이 있었는데 부산역 주차장 에 차를 파킹 시키고 회식 에 참석 하였다.
그날따라 2차 로 자리를 옮겨 한잔 더 마시는 자리가 되었다.
아침 에 일어나 차 찾으러 좀 일찍 출근 하려고 대문을 나서는데
부산역 주차장 에 있어야 할 차가 대문 앞에 떡 버티고 있는게 아닌가?
당시 엔 대리운전 도 없던 시절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술취해서 차를 내가 몰고 온게 분명했다.
기가막히고, 눈앞이 깜깜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일을 계기로 정말 스스로 많이 반성,반성,반성 하였다.
그날이후 음주운전 은 안하고 있다.
주말이면 가족 들을 오토바이 가 아닌 승용차 에 태우고 부산근교 로 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지금 은 ‘부산신항’ 이 들어서고, ‘거가대교’ 개통 으로 이 육지 와 연결 이 되어 다니기가 쉬워진 ‘가덕도’ 가 있는데,
당시엔 ‘용원’에서 선외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이었다.
20노트 의 속력 으로 달리는 ‘선외기’ 를 타고 바다를 달리면,
피부에 와닿는 바닷바람 이 아주 상쾌 한데
집사람 은 그때 선외기 타고 가덕도 들어갈 때 아주 재미 있었다고,
이야기를 지금도 가끔 한다.
진해 벛꽃축제 때는 벛꽃놀이 한번 가려다 중간 에 차가막혀 같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도로 집으로 돌아온일 이 있었는데 그이후 아직 진해 벛꽃놀이 는 한번도 못가보고 말았다.
경남 양산군 대변항 에는 봄이면 멸치잡이를 많이 하는데 그때 거기한번 갔다가 그이후로는 위생상 멸치젓 을 별로 안좋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변항내 에서는 멸치어선 들이 접안 하여,
선원들이 잡아온 멸치 를 그물 의 멸치털기 작업 을 하는데,
배주위 인근 식당에서 흘러 나오는 생활하수 가 그대로 방치되어
항내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선원 한사람 은 멸치를 털다 말고 어선 화장실 로 볼일 을 보러 간 모양 이었다.
그사람 이 화장실에서 볼일본 ‘대변’ 덩어리 가 ‘대변항’ 으로 바로 빠져
나와서 둥둥 떠다니더니 멸치터는 그물로 들어가 멸치와 함께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장면을 보고난 그후로는 나는 멸치젓 먹어본 기억 이 없다.
지금도 항내에서 그런식 으로 멸치를 터는지
국민건강상 비 위생적 일수밖에 없다.
생활하수 가없고, 오염되지 않은 좀 깨끗한데서 멸치를 털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오토바이 를 주셨던 손위 둘째처남 은 아들이 3형제 가 있었다.
당시 손위 처남 은 대전서 서기관 으로 근무 할 때 였는데
어느날 부산 에 볼일 보러 왔다가 우리집 에 겸사겸사 잠깐 들렸었다.
부산 에 모처럼 오셨으니 해운대 로 점심먹으러 갈려구 막 대문을 나서는데 안양 처제 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째 가 교통사고 로 사망하여 지금 대전 어느 병원 영안실 에있으니,
오빠 에게 잘 이야기 전달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사실 은 사실 아닌가?
나는 형님 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전달해야하나?
순간적 으로 고민 이 되었다.
할수없이 말을 꺼내야만 했다.
“ 형님, 철희 가 지금 오토바이 타다가 넘어져서
손가락 다쳐서 지금 어느 병원 에 입원 해 있다고 하니
그냥 간단히 요앞에 중국집 에가서 짜장면 이나 한그릇씩 하고 올라 가시죠”
“ 그려? , 걔 오늘 졸업 시험 보는날 인데?”
그렇게 짜장면 으로 점심을 때우고 바로 대전으로 출발 하셨다.
나도 다음날 바로 월차를 내고 대전 으로 향하였다.
가서 자초지종 예기를 들어보니....
이건 뭐 ‘철희’ 가 잘한게 하나도 없었다.
내용인즉 은...
1. ‘헬멧’을 안쓰고 왼쪽 팔뚝에 걸치고 간점
2. ‘차선’을 안지키고 1차선 으로 간점.
3. 앞차와의 ‘안전거리’ 를 안지키고 바짝 붙어 간점.
4. 앞차가 사정 에의해 급정거하니 앞차를 들이밭고 ‘중앙선’을 넘어
반대차선으로 튕겨 나갔는데 마주오던 승용차가 정면으로 들이받아
뇌진탕 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1. '헬멧' 만 썼었더라도.....
2. 차선만 '2차선' 으로 갔었더라도.....
3. 앞차와의 '안전거리' 만 두고 갔었더라도....
철희 의 운명 은 여기까지 였었나보다!.....
명절때 가되어 청양 처갓집 에 식구들이 모였을때 장모님 은 철희 가 왜 안보이느냐고 물으셨고
우리는 철희 지금 외국으로 유학 가서 몇년 있다가 올거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건 보험처리 도 안될뿐더러 , 그야말로 안타까운 죽음 그 자체 였다.
교통법규 를 지킨게 하나도 없었다.
그후 두 조카들 은 모두 장성 하여
둘째는 미국에서 목회 를 하고있고
셋째는 공군전투기 조종사 를 하더니
지금은 전역하여 대한항공 기장 으로 근무 하고있다.
그렇게 부산지부 에서 의 근무 가 어느듯 3년 이란 세월 이 흐르고 나니...
곧 인사이동 철 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제12부 끝-